음식을 파는 상인들, 친구들과 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웃기도 하고, 초조함을 달래기도 했다.
겉모습만 보면 영낙없는 축제 현장이다.
신체 검사를 마친 일부 청년들은 손에 부적을 들고 행운을 빌었다.
그들의 친구들은 둥글게 모여 “씨담(สีดำ, 검은색)”을 반복해 외쳤다.
검은색은 면제를 뜻하는 상징이다.
과정은 매우 투명해 보인다.
질서 유지를 위해 구역을 나눠두었지만, 접근 및 촬영에도 제한은 없다.
모든 과정이 공개된다. 동행한 가족과 친구들이 대기할 수 있도록 의자도 마련돼 있다.
의자 앞에는 자진입대와 제비뽑기 입대 시의 복무 기간 비교표와,
군 복무 시 제공되는 각종 복지를 설명하는 플래카드가 게시돼 있었다.
제비뽑기 과정은 이렇다.
큰 통에 검은색 카드와 빨간색 카드를 넣고 한 사람씩 나와 직접 뽑는다.
이에 앞서 징병관은 그날 신체검사 인원, 현역 입영 대상자 수, 배치 부대 등을 자세히 설명한다.
관련 서류를 높이 들어 보이며, 추첨 통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음을 미리 보여준다. 마술쇼 할 때 보던 장면이다.
이날 이곳에서는 200여 명이 신체검사를 받았고,
그중 제비뽑기로 입대를 결정하기로 한 청년들은 60여 명.
이 중 27명이 제비뽑기를 통한 현역 입대 대상자라고 발표됐다.
추첨 대상자 중 45%가 현역 대상인 셈인데 사람들 사이에서 “우~” 하는 탄식이 터졌다. 생각보다 현역복무가 많은 수치였기 때문이다.
라자망갈라대학 2학년인 넷은 입영 대상자인 친구 3명과 함께 왔다.
내년 입대 예정인 1년 후배 5명도 동행해 계속해서 “담, 담, 담”을 외쳐댔다.
태국인들은 이 제비뽑기를 “짭 바이담 바이댕(จับใบดำใบแดง)”이라 부른다.
직역하면 ‘검은 종이, 빨간 종이 뽑기’란 뜻이다.
실제로는 종이 대신 카드나 공이 사용되기도 한다.
신체검사 후, 징병검사관 앞에 나아가 통 안에서 카드나 구슬을 직접 뽑는다.
검은색 카드를 뽑으면 즉시 면제되어 집으로 돌아가고,
빨간색 카드를 뽑으면 현역 입대가 결정된다.
검은 카드를 뽑으면 환호성이, 빨간 카드를 뽑으면 탄식이 터진다.
배곪던 옛날이면 모를까 제비뽑기로 군대가길 바라는 청년은 없다.
승려도 예외는 아니다.
현역 복무가 결정되면 승복을 벗고 군복을 입어야 한다.
간혹 빨간 공을 뽑고 충격을 받은 청년이 실신하기도 한다.
징병관들이 이를 대비하고 있다. 추첨하는 청년들의 손과 몸을 꼭 붙잡아주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인가?
누군가 현역입영을 뜻하는 빨간색이 나오면 관객들은 환호하기도 한다.
그만큼 면제의 기회가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태국 징병제도에는 엄청난 ‘반전’이 하나 더 있다.
제비뽑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입대하는 ‘자진입대’ 선택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 경우 특별 보너스로 복무 기간이 대폭 단축된다.
단축 기간은 학력에 따라 다른데
대졸자는 6개월, 고졸자는 1년으로 복무기간이 확 줄어든다.
징병관은 “제비뽑기 직전이라도 마음을 바꾸면 자진입대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검은색 카드를 뽑아 면제받을 자신이 없으면, 현장에서 바로 입대하겠다고 선언하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변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몇몇 청년에게 자진입대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모두 “검은색 카드를 뽑아 면제될 것”이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그만큼 태국 청년들은 이 ‘운명의 제비뽑기’를 자신있게 임한다는 뜻이다.
뭘 믿고 그런 ‘복불복’에 나서는지는 아리송하다.
2025년 입영 대상자는 2004년생부터이며, 만 21세 이상이다.
이제 막 성인이 된 청년들이다.
그런데 어쩌면 인생의 가장 중요한 한 순간의 선택을 단 한번의 그리고 물릴수도 없는 ‘복불복’ 게임에 맡기는 것이다.
자진입대를 통해 복무기간을 단축할 것인가,
아니면 제비뽑기로 검은 카드를 뽑아 면제받을 것인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인생의 첫 선택을 이들은 이렇게 스스로 감내한다.
그렇다면 제비뽑기 후 현역 입대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지난 2024년 기준으로는 35.8%, 약 3명 중 1명꼴이다.
2024년 전체 징병 목표 인원은 96,942명.
이 중 49,994명은 제비뽑기를 하지 않고 자진입대를 선택했다.
제비뽑기에 응한 태국 청년은 약 13만 명이며,
이 중 46,948명이 빨간 카드를 뽑아 입대하게 됐다.
징병검사장은 남성 전용이지만, 외모가 남다른 여성들도 눈에 띈다.
이들은 트랜스젠더이거나 여성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태국에서 통계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많다.
면제여부는 의료진의 판단에 따른다.
이날도 서너 명의 여성으로 보이는 징병검사 대상자들이 남자들 틈에 있었다.
태국 국방부에 따르면 2024년 성전환자 혹은 여성성을 입증해 면제받은 인원은 5,964명, 전체의 2.41%에 해당했다. 역대 최고치 였다.
방콕, 치앙마이, 콘깬 등 대도시 출신이 많았다.
성전환 수술이 필수는 아니다.
호르몬 치료나 장기간 여성으로 살아온 이력도 인정된다.
과거에는 정신질환으로 분류됐으나, 현재는 신체적·심리적 성 정체성이 군 복무에 부적합하다고 판정된다.
태국 톱스타 마리오 마우러는 자진입대를 선택한 유명인으로 알려져 있다.
K-POP 2PM의 태국인 멤버 닉쿤도 2009년 징병검사장에 웃통을 벗고 신체검사를 받았다. 오빠부대들이 하루종일 닉쿤을 연호했다.
닉쿤은 그해 운이 좋았다. 자진입대자가 많아 자동 군면제를 받는 행운을 누린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닉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군 면제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ROTC처럼 일정기간 군사 훈련을 받은 이들도 면제가 가능하다.
이 비율은 20에서 25%다.
건강이상, 부양가족이 있는 경우도 면제가 가능하다.
대학교재학, 유학 등으 이유로 병역을 연기하는 경우도 해마다 30에서 35에 달한다.
현역 복무 시 월급은 약 55만원. 한국 병장의 월급이 205만원이지만 .
과거에는 태국 군인의 급여가 한국보다 더 높았던 시기도 있었다.
정치권에서는 모병제로의 전환을 논의 중이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많다.
현장에서 보면 부정 개입 없이 투명하고 공평하게 진행되는 것으로 보인다.
태국은 19세기 초까지 농민 계급을 대상으로 징병관이 직접 마을을 돌며 병력을 모집했으나,
1905년 군사법 제정과 함께 지금과 같은 제비뽑기 제도가 도입됐다.
과거에는 베트남, 대만 등에서도 비슷한 추첨 제도가 있었지만
지금은 태국이 전세계에서 유일하다.
검은색 카드를 뽑으면 환호하고, 기뻐 펄쩍 뛰어오르지만
빨간색을 뽑아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들이다.
간혹 승려나 청년이 혼절하는 경우가 있긴하다.
이날 후배들의 응원을 받으며 제비뽑기에 나선 친구 3명중 2명은 면제를 한명은 현역판정을 받았다. 2명은 환호성을 질렀지만 1명은 담담하게 입대절차를 설명듣는 모습이었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운'에 맡기는 게 무척 낯설지만,태국 청년들은 제비뽑기가 공정하고, 오래된 문화라는데 동의했다.
세상 일이 모두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태국인들의 삶에 대한 자세가 엿보였다.(by Har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