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건설에 동원된 인력은 연합군 전쟁포로와 인도네시아 미얀마 말레이시아 등 식민지 국가들의 사람들이었다. 약 25만 정도로 추산되는 포로들은 건설내내 강제노동에 시달리며 질병, 영양실조, 과로 등으로 11만6천여 명이 사망했다. 철도 침목 하나에 사망자 한 명이 나온다고 하여 ‘죽음의 철도’라는 이름도 붙었다.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거나 통역하는 사람 가운데에는 한국인이 있었다. 한국인 군속은 일제 강점기에 징용을 당해 일본군대의 장병이나 군속으로 동남아로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철도공사에서 한인들은 일본군으로부터는 식민지 신민으로 차별과 감시를 당했고, 연합군 프로들로부터는 일본 제국주의의 악행에 대한 책임과 비난을 뒤집어쓰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KBS 탐사보도 프로인 '시사 기획 창'-광복 70년 특집 '끌려간 소녀들 버마 전선에서 사라지다'는 2015년 기밀문서에서 해제된 태국 최고사령부의 문서보관소를 통해 한인여성 490여 명이 깐차나부리 위안부 시설에 있었음도 확인했다. 죽음의 철도를 연결한 콰이강의 다리는 2차대전의 상처를 말해주고 있다. 1957년 데이빗 린 감독이 만들고 윌리암 홀든, 잭 호킨스가 주연을 맡은 영화 `콰이강의 다리(The bridge over the River Kwai)’는 당시의 상황을 재연했다.
영화 개봉 다음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 및 작품상 7개 부문의 상을 휩쓸며 영화 주제가이자 휘파람인 ‘콰이강의 행진’을 전세계에 확산시켰다.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자 연합국 측은 동남아 각지에 일본군으로 파병된 한국인들을 아유타야 포로수용소에 집결시켰으며, 콰이강 다리 건설 군속을 맡았던 한국인들은 전범혐의자로 체포되기도 했다. 당시 종군위안부 포함 한국인은 2천여 명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인들은 모두 귀국하였으나 12-15명의 젊은이들은 수용소를 탈출해 태국에 남았는데 이들이 제1세대 태국 한인들로 전해지고 있다.
▶빠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1966년 현대건설이 완공한 태국 남부 빠따니-나라티왓 구간의 98km 고속도로 공사는 한국이 태국에서 첫 수주한 대형공사였다. 16개국 29개 건설업체가 참가한 입찰경쟁에서 공사를 따낸 현대건설은 전동식 롤러, 컴프레서 믹서기 등을 직접 고안해 만들어 쓰며 최신 공법도 익인 것으로 전해진다. 수주결과는 적자였지만 훗날 한국의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수 있었던 기술력은 여기서 나왔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