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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한인 70년사(11): 한국 혼 심은 태권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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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한인 70년사(11): 한국 혼 심은 태권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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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한인 70년사-100년을 향한 전진’이 발간되었다. 태국에 한국인들이 어떻게 정착하고 살아왔으며 발전해 왔는가를 다루고 있다. 또 태국에 진출한 공기관과 각 기업, 언론, 종교단체, 한태교류의 역사, 태국내 주요한 한국인, 태국거주 한국인들이 태국에 대해 느끼는 설문조사, 태국의 각종 상식과 팁 등이 포함되어 있다. 발간된 책을 중심으로 일부 발췌해 소개한다. 통권은 재태국 한인회에 문의.
[3장}
한국 혼 심은 태권도
▶태국에 한국 혼 심은 의지의 재태 한인 무도인들
2장 한국 혼 심은 태권도
2021년7월24일 저녁이었다. TV 앞에 모여든 태국인들은 입술에 침이 말랐다. 도쿄올림픽 결승전에 오른 태국 태권도 여자대표팀의 파니팍 웡파따나킷이 경기가 끝날 무렵까지 스페인 선수에게9-10으로 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종료7초 전 기적이 일어났다. 파니팍이 왼손 정권을 상대선수의 몸통에 강력히 적중시키며11대10의 영화 같은 역전승을 일궈낸 것이었다. 종료 직전 무엇인가를 말하는 코치의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다. 그는 평소훈련때 종료30초, 10초를 남겨놨을 때의 상황을 상기시키며 무언가를 주문하고 있었다. 한국인 최영석감독이었다. 최영석감독은 태국 스포츠에 한국혼을 심은 주인공이다. 문화 한류가 있다면 ‘태권한류’의 주역이라고 표현할 만하다.
도쿄올림픽에서의 금메달로 태국 태권도는 올림픽골드메달 반열에 합류했다. 1952년부터 올림픽에 참가해 온 태국이 역대올림픽에서 따낸 금메달은9개였고, 그 전까지는 역도(5개)와 복싱(4개) 2종목뿐이었다. 역도, 복싱, 태권도 외에는 올림픽에서 일군 메달종목 자체가 없었다. 태국 태권도는 2004년 한국의 가난한 산골 출신 최영석 코치를 지도자로 영입하며 기적의 역사를 시작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참가한 여자선수가 태권도 종목에서 첫 동메달을 따내며 그 서막을 알렸다.
이후 아시안게임, 올림픽 등 이목이 집중된 스포츠 축제에서 최영석감독의 태권도는 태국인들에게 해마다 증폭된 감동을 안겨주었다.
태국 태권도팀은2004년 아테네 올림픽 동메달을 시작으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은메달, 2012년 런던 올림픽 동메달, 2016년 리우 올림픽 은과 동메달 각 1개, 2021년 도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수확했다.
올림픽은 물론 각종 대회에서 태권도의 승전보가 이어지며 태국 태권도에는 엄청난 변화가 몰아쳤다. 젊은이들에게 태권도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지름길이 됐다. 태권도 인구는 2000년 초반 5만 명에서 2010년쯤엔 20배가 늘어난 100만 명이 넘어선 것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태권도는 태국의 전통 스포츠인 무에타이의 인기를 넘어섰으며 태국정부는 한국보다도 먼저 태권도 전용훈련장까지 마련해 줬다.
태국 언론들은 최영석감독을 한국 축구의 월드컵4강 신화를 이끈 ‘히딩크’에도 비교하지만 그가 태국에서 거둔 업적과 반향은 그 이상이었다. 2013년부터는 최영석의 이름을 딴 태권도대회가 열리고 있으며 수천 명이 참가하고 있다. 도쿄 올림픽 감동에 벅찼던 태국 정부는 최영석감독에게 태국국적을 부여했다.
최영석감독이 올림픽을 통해 태국 태권도를 화려한 불꽃으로 점화시켰다면 그 바탕엔 또 다른 한국인들이 있다.
1972년 적수공권으로 태국에 와 50년 넘게 태권도의 화랑5계를 파급시키며 교육한 송기영사범과 그의 뒤를 이은 여러 한국인 사범들이 그들이었다. 태국 태권도는 1982년 싱가포르 아시아대회에서 3위를 기록하고, 네팔과 말레이시아 대회에서 줄줄이 우승하는 등 국제대회에서 이미 두각을 나타냈다. 태권도를 가르친 한국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송기영 사범은 태국 태권도 역사의 ‘대부’이다.
전북 진안출신의 송기영 사범은 1972년 태국에 온 한인원로로 태권도와 일생을 함께 했다. 태국 진출 후 방콕 로얄 스포츠클럽에서 태권도를 가르치며 지방을 순회하며 열정을 불태웠다. 그는 ‘초창기 서민층이 아닌 부유층에게 태권도를 가르친 게 태국 태권도 파급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자평한다. 로얄 스포츠클럽에서 가르친 제자 말리까 캄파논다라는 여성은 그가 배출한 첫 유단자로 1975년 태국 태권도 학교를 설립하고 2만여 명의 태권도인을 배출했다. 말리까 여사는 이후 각종 국제태권도 대회를 후원하기도 했다. 태국 최남단에서는 오랫동안 송기영 태권도대회가 열렸다.
송기영 사범은 태국 태권도가 크게 발전하는 것은 최영석을 포함한 훌륭한 코치들이 많고 태국 사람들의 기질 때문이라도 풀이했다. 태권도가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되기 한참 전인 1982년 태국은 싱가포르 아시아대회에서 3위를 했고, 그 뒤 네팔과 말레이시아 대회에서도 줄줄이 우승했다는 것이다. 송기영 사범은 ‘태권도는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라고도 말한다.
2006년부터 태국 왕실경찰사관학교를 지도하고 있는 정성희 사범은 태권도를 태국 지도층에 한층 업그레이드 해 각인시킨 주인공이다.
왕실경찰사관학교가 60여년의 역사가 되도록 한국인 사범의 강의는 그가 처음이었다. 탁신 전 총리도 왕실경찰사관학교 출신이다. 정성희 사범은 2010년부터는 한국의 대통령 경호실 격인 태국 왕실 경호부대, 2014년부터는 태국 육군학교 지도교수로 태권도를 가리치고 있다.
그가 지도한 제자들이 태국 경찰 및 군의 장성 및 지도자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2011년부터는 한국 사범최초로 왕실대회 타이틀을 받아 태국 왕실공주컵 국제태권도대회를 열고 있다. 그는 2002-2004년까지 세계 태권도 문화축제에서 창작품새 부문 3연패를 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태권도 도장을 경영하며 국제심판으로 활약하고 재태 한인회 부회장으로 태국 한인사회에 봉사하기도 했다.
태국 한인 태권도 사범들이 서로 긴밀히 협조하고 교류하는 것은 태국의 태권도 보급과 저변확대의 자양분이다. 태국 각 지방을 돌려 정기적으로 회의를 갖고 태국에서 태권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지와 심사 등에 대한 원칙을 세우고 있다.
신영균사범은 2017년 태국 장애인 태권도 협회를 창단해 2년여만에 세계대회에서 금메달을 일궈낸 뚝심의 한국인이다. 2001년 태국에 와 20년간 주목받지도 못하는 태국 젊은이들을 자비를 들여 훈련시키며 “미래는 모두 꿈꿀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있다.
K-POP이 융성하기 이전, 세계 각지로 떠난 태권도인들은 그 어떤 문화 컨텐츠보다 훌륭한 한국 알리미였다. 한 때 세계 150위권이었던 태국 태권도 랭킹은 4위까지 점프하고 태국인들은 무에타이보다 태권도에 더 열광한다. 알아주지 않아도 하얀 도복의 외길을 걸어온 의지의 재태 한국 무도인들이 일궈가는 결과다.
특별 인터뷰
송기영 사범
태국 태권도의 전설, 태국에 바친 50년의 삶
“이제 내 소원을 이뤘어요.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고령으로 몸이 불편한 송기영 사범은 도쿄 올림픽에서 마침내 금메달을 딴 것에 대한 감격과 기쁨을 밝히고 또 밝혔다. 그는 맨주먹이 전부였다. 크지 않은 체구에 더운 날씨는 태국 적응이 쉽지 않았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괴롭혔다. 믿는 것은 단 하나였다. 젊디 젊은 그 자신뿐. 1972년 말 적수공권으로 태국 방콕 돈므엉 공항에 발을 디딘 그의 나이는 서른 셋이었다. 그리고 51년이 꿈결처럼 흘러 팔순을 훨씬 넘긴 노인이 됐다.
강산이 변했을 망정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태권도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겐 송사범이란 호칭이 여전히 가장 잘 어울린다. 태국내 한국 태권도인들은 태국 태권도를 논하려면 송기영 사범을 먼저 찾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는 ‘태국 태권도의 대통령’으로도 불린다.
도쿄 올림픽에서 마침내 금메달을 수확하며 각종 대회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는 태국 태권도의 첫 씨를 뿌린 사람이 바로 송기영 사범이라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이 있지 않느냐’며 한사코 인터뷰를 사양한 그를 설득해 2013년 어느날 방콕 시나카린 집에 있는 집을 찾았다. 크지 않은 3층 양옥인데 그가 혼자서 수련한다는 도장이 1층에 잘 정돈돼 있었다. 도복차림의 그가 꼿꼿이 서서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한 눈에도 무도인으로 살아온 외곬인생이 형형한 눈빛에 고스란히 투영되고 있었다.
-체육관 벽에 한글과 태국어로 함께 붙어있는게 ‘화랑 5계’ 이죠?
▶내가 세운 태국 태권도의 훈(訓)입니다. 나라에 충성할 것, 스승을 존경하고 부모에 효도할 것, 친구를 신의로 대할 것, 살상하지 말 것, 싸움에서 물러서지 말 것입니다. 승단 심사할 때 외우게 하죠.
-태국에만 있는 ‘송기영 태권도 브랜드’ 인 셈입니다.
▶지금도 태국도장 대부분에서 이를 붙여 놓고 있습니다. 태국에서 태권도가 완전히 인정받은 것도 이 화랑5계 덕이 큽니다. 스님들도 태권도를 배우라고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태권도를 10급으로 나눠 한 급마다 5개씩 가르치도록 매뉴얼화 하기도 했습니다. 태국인은 돌려차기는 잘하지만 옆차기는 잘 못합니다. 훈련성과가 다소 다르게 나타나긴 하지만 이 매뉴얼이 현재 태국의 많은 도장에서 쓰이고 있습니다.
-태국에는 언제 오셨지요?
▶ 1972년 12월에 왔습니다. 인연이 있는 분이 태국 대사관에 참사관으로 먼저 나와 있었는데 몸만 오면 된다고 해서 정말 한푼도 없이 왔습니다. 한달에 2천-3천 달러는 벌수가 있다고 했는데 당시로선 정말 큰 돈이었습니다. 돈므엉 공항에 내렸죠. 지금 처럼 더운 열기가 훅하고 느껴졌어요. 태권도 사범으로 왔는데 처음 2년 동안은 대접을 정말 잘 받았습니다. 일주일에 3번은 방콕 로얄 스포츠클럽에서 가르쳤고, 나머지 3일은 코랏 같은 지방에도 다녔습니다. 먼저와 태권도를 가리키고 있는 여섯분이 계셨는데 순수하게 태권도를 가르쳤다기 보단 사업과 연관이 있었습니다.
-태권도는 언제부터 시작한 것인가요?
▶전북 진안에서 태어나 전주 농고를 나왔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일자리를 찾아보려고 서울에 갈 결심을 했어요. 3남4녀중 내가 셋째인데 집에선 서울 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어요. 부자는 아니었지만 집이 살만은 했거든요. 결국 내 고집대로 서울에 올라가 여름에는 아이스크림, 겨울에는 땔감장사도 했습니다. 그러다 외국에 나가볼까 하는 생각으로 태권도를 하게됐습니다. 서울 신촌 무덕관에 나갔는데 첫날보니 덩치가 큰 어른들이 많았고, 강하게 훈련을 시키고 있었습니다. 체구가 적은 나는 주눅이 들었죠. 군생활 마치고 태권도 가르치러 캐나다로 가보려고 했지만 비자문제로 여의치가 않아 태국에 먼저 와 있던 분의 권유로 태국에 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태국에 오래 살며 어떤 느낌을 가지고 계신가요?
▶살아 남으려고 애써 왔다는 것 뿐입니다. 사업이나 정치 그런 건 난 모릅니다. 태권도 밖에 몰랐어요. 태국에 온 뒤 처음 2년은 괜찮았지만 가르치던 미군들이 떠나면서 경제적 어려움이 시작됐습니다. 로얄스포츠 클럽에 나가 가르쳤지만 입에 겨우 풀칠이나 할 정도였죠. 태권도에 대한 텃세도 적지 않아 힘들었습니다. 키가 2미터나 되는 미국 해병대가 태권도를 좀 한다고 다니다 죽임을 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태국 태권도가 급속히 보급됐습니다.
▶서민층이 아닌 부유층에게 태권도를 가르쳤기 때문이에요. 내가 있었던 로얄 스포츠클럽만 해도 왕족부터 재력가까지 많은 사람이 배웠습니다. 로얄 스포츠클럽에서 말리까 캄파논다라는 여성을 만났는데 이 여성을 만난게 태국 태권도 인구 확산의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말리까 여사는 내가 배출한 첫 유단자로 1975년 태국 태권도 학교를 설립하고 2만여 명의 태권도인을 배출했습니다. 말리까 여사는 이후 각종 국제태권도 대회를 후원했습니다.
-처음 배출한 유단자와의 인연이 특별합니다.
▶말리까 맘파논다는 나보다 두살 위였어요. 아버지가 왕실 주치의였는데 재력가 이기도 했습니다. 미국으로 떠난 김진성이란 사범이 나보다 먼저 가르쳤는데 그 당시는 청띠였죠.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방콕 로얄 스포츠클럽에서 태권도를 배우는 사람들의 수준도 높았습니다. 왕족도 있고, 나중에 은행 중역이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내가 만약 가난한 사람을 가르쳤다면 태국 태권도 확산에도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무술들의 방해도 많았죠. 한번은 타이복싱(무에타이)에서 한번 붙자고 도전장을 보내온 적도 있었습니다. 속으로 무척 걱정했는데 결국 우리가 다 이겼죠. 그 뒤로 인식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송기영배 태권도대회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얼마 전에도 태국 최남단 3곳에서 송기영 태권도대회를 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송기영 사범은 94년 이후 한동안 사비를 쾌척, 태국 태권도 선수들에게 우승컵과 메달 등을 수여하기도 했다.) 태국 남부에 태권도 인기가 많습니다. 쏭클라대학 파타니 대학에 관차이란 사람이 그곳에서 태권도 관련 많은 일을 하고 있는데 제자입니다.
-태국 태권도가 올림픽 등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비결이 있을까요?
▶우선은 최영석 같은 좋은 코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다 태국 사람들은 기질이 있어요. 태권도가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되기 한참 전인 1982년 싱가포르에서 가서 아시아대회를 했는데 태국이 3등을 했습니다. 그 뒤 네팔과 말레이시아 대회에서도 줄줄이 우승했습니다. 지금처럼 미디어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국제대회에서 태국이 참 잘 했습니다. 태국은 태권도를 정말 잘하는 나라입니다. 타이복싱한 경력이 있어 몸이 빠릅니다. 제일 흡족한 것은 태권도의 위상입니다. 과거엔 무술협회라는 곳이 있어 가보면 구석에 앉아 있곤 했는데 이제는 태권도 때문에 이 협회가 유명무실해졌습니다. 태국 타이복싱도 머리띠를 6급으로 나눠 구분하는 등 체계화하고 있죠. 태권도의 영향입니다.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기 까진 세계를 돌아다니며 태권도대회를 연 외국 사범들의 역할이 큽니다.
▶태국 태권도가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것은 물론이지만 인구도 정말 많이 늘었습니다. 태권도 인구가 100만 명은 넘은 것으로 봅니다. 타이복싱 코치들이 모두 태권도로 전환했을 정도니까요. 인구층이 두터워 진 것이죠.
-태국 내 한국에 대한 인상도 많이 달라지지 않았나요?
▶내가 태국에 온 1972년만 해도 태국이 훨씬 잘 살았습니다. 한국사람들을 보는 태국 사람들 눈이 많이 달라진 것은 물론입니다. 지금의 한류도 참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근본이 어디서 왔나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태권도를 해서가 아니라 한류 이전에도 한국의 역사가 있었다고 봅니다.
-태국인들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가요?
▶태국인은 굶지 않고 한데서 자지 않습니다. 정이 넘치고 예의 바른 민족입니다. 내일이 아니면 다른 사람 일에 상관을 하지 않죠. 한국인이 접하는 사람들은 관광지 태국일 뿐입니다. 이를 보고 태국인 전체를 판단하면 안됩니다. 재태 한인의 역할은 매주 중요합니다. 한국 학생들을 보면 본을 보여야 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외교관이 되어야 한다고요.(송기영 사범은 제 23대 한인회장으로 2년간 재임하기도 했다.)
-한국엔 자주 가시나요.
▶형제들이 다 한국에 있습니다. 명절엔 안가도 선거 땐 꼭 갑니다.
-태권도에 대해 어떻게 정의 하시나요.
▶태권도는 싸움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태권도는 일생 동안을 도와줍니다. 매일같이 잊지 말고 화랑5계를 외우길 권합니다. 이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후학들에 대해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무도를 하는 사람은 사업에 밝지 못합니다. 장사를 잘 하려거나 하면 그만둬야 합니다. 무도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합니다.
-태국 태권도에 바라는 점이 있으신가요?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태국은 2021년 도쿄올림픽에서 송기영 사범의 말처럼 금메달을 땄다). 이 사람들 피에 그런 것이 섞여 있습니다. 다른 나라는 태권도의 씨를 뿌린 해가 50~100년 되지만, 태국은 30~40년 인데도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태국 사람들은 패기와 승부욕이 있습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송기영 사범은 집 찬장 문을 열어 보여줬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영정사진과 맑은 물 한잔이 놓여 있었다. 물 잔 옆에는 태권도 포즈를 취한 인형 하나가 다소곳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매일 아침 물잔을 바꾼다고 했다. 화랑 5계의 한 구절. `’부모에 효도하라!’ 태국 태권도에 강하고도 질긴 씨를 뿌린 송기영 사범은 이국 땅에서 자신이 평생 가르쳐온 태권도의 훈(訓)을 몸소 실천하는 표리일체(表裏一體)의 삶을 살고 있었다. (*인터뷰는 2013년 태국어 한국어 바이링구얼 매거진 The BRIDGES 매거진의 특별 인터뷰를 토대로 재구성했으며 2022년 7월 두번째 인터뷰를 했다.)
특별 인터뷰
최영석 감독
더 큰 꿈꾸는 태국 태권도 영웅
★꿈은 이루어진다.
그 가운데 언제나 최영석이 있었다. 최영석 감독이 이끄는 태국 태권도는 2021년 도쿄올림픽에서 마침내 오매불망 꿈꾸던 금메달을 따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첫 동메달을 태국에 안기며 밟아왔던 계단의 정상에 우뚝 선 것이었다. 최영석의 태국 태권도는 눈부셨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은메달, 2012년 런던 올림픽 동메달, 2016년 리우 올림픽 은과 동메달 , 2021년 도쿄 올림픽 금메달까지 거칠 것이 없었다. 모든 순간들이 기적같았고 그는 태국의 ‘영웅’으로 불렸다. 올림픽의 태권도 승전보가 전해질 때마다 태국인들은 전율했다. ‘태권 한국’이 태국인들의 마음 깊이 파고 들었다. 정상에 오른 다음 수순은 무엇일까?
-금메달 감격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네요. 이제 무엇을 준비하고 있나요?
▶도쿄 올림픽 후 정말 정신없는 시간들을 보냈어요. 방송 출연에 CF까지 코로나 기간 중임에도 바쁜 날들이었어요. 돌아와서 3개월 뒤부터 2년 뒤에 있을 파리올림픽 준비에 들어갔어요. 내년 항저우 아시안게임도 대비해야 하고요. 얼마 뒤 선수선발전이 있을 계획입니다. 스포츠심리학 박사로 태국 카세삿대학 전임교수로 임용돼 강의 준비도 하고 있습니다.
-태국에서 많은 것을 이뤘습니다. 이제 또다른 꿈은 무엇인가요?
▶ 태권도가 태국에 뿌리내려 더 많이 보급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태권도가 태권도 자체만이 아닌 태국 스포츠문화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가령 대학에 태권도 학과가 생기는 것 처럼 보다 많은 저변확대가 되게 하고 싶습니다. 혼자의 힘으로는 어렵겠지만, 그 작은 디딤돌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도쿄 올림픽 이후 태국이 국적을 부여하기로 했습니다. 태국에서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했던 기억이 나네요.
▶태국은 태국 국적이어야만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습니다. 20년째 지내고 보니 더 그런 것 같습니다. 태국 국적이 없으면 태권도 협회 임원이 돼 정책수립에 참여한다던지 하는 일을 할 수 없죠. 그 동안의 경험을 살려 태권도 인프라를 더욱 확대하고 싶습니다. 태권도는 곧 대한민국이니까요.
-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뭔가요?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 태국 대표팀의 한국코치가 개인사정으로 귀국하게 돼8개월간 계약직 코치를 맡게 됐어요. 당시 바레인에서 코치로 있었는데, 막 계약이 끝날 때 쯤이었죠. 태국으로 오게 된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대타였던 셈입니다. 2월에 코치 직을 맡고, 10월에 대회가 열렸는데 은메달 2개를 땄습니다. 태국으로선 당시 최고 성적이었습니다. `죽도록 가르쳐 보자’는 생각 밖엔 한 것이 없습니다.
-그 뒤부터 승승장구 했습니다.
▶ 2년 뒤인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선 여자 -49kg에서 동메달을 땄습니다. 올림픽에 출전한 것도 처음이지만 메달을 딴 것은 전례 없던 일이었죠. 사실 당시 올림픽에 출전 자격을 얻는 것 자체가 힘들었습니다. 남-녀 각각 2체급씩만 출전할 수 있는데, 2004년 올림픽에서 태국이 4장의 올림픽 출전 티켓을 확보한 것 하나만 해도 큰 사건이었습니다.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 였습니다.
-계단을 밟듯이 국제대회에서 계속 좋은 성적을 내왔습니다. 비결이 있나요?
▶훈련 량을 늘리고, 같은 훈련도 집중해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수들은 훈련한 게 억울해서 맨손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죠. 또 정신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태권도는 멘탈 스포츠입니다. 기록경기가 아닙니다. 반드시 상대방이 있거든요. 선수들의 정신력을 강하게 하는 것은 관찰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스포츠심리학을 공부했지만 한 달만 지켜보면 다 알 수 있어요. 성격이 경기에서 그대로 나타납니다. 소심한 선수는 격려해 주고, 외향적인 선수는 자제토록 합니다. 코치들의 기술지도는 다 비슷할 것이라고 봅니다. 선수의 장점이 80%라면 100%가 되게 끌어 올려줍니다. 단점은 보완할 수 있을 만큼 고쳐줍니다. 가령 방어가 안 되는 선수가 있다면 계속해서 발차기 공격을 해서 막게 합니다. 선수들을 공평하게 대해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못한다고 야단만 치면 절대 실력이 나아지지 않습니다. 동기를 부여해 주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지도자고 스승이라고 생각합니다.
-훈련이 강하다 보면 선수들 불만도 나오겠네요.
▶고된 훈련이지만 속속 드러나는 성적결과를 보고, 인정하며 열심히 따라옵니다. 훈련할 때와 경기할 때는 완전히 다르게 선수들을 대하는 편입니다. 경기를 앞두고는 선수들과 장난치고 웃기기도 하지만 훈련 때는 에누리 없습니다. 물 한 모금, 화장실 가는 것 조차 다 허락을 받도록 합니다. 새벽 운동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돌려보냅니다. 내가 감독이라고 해서 훈련시간에 늦는 일은 없습니다. 운동은 못해도 약속을 지키고 인성을 닦으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국제대회에 나갔을 때 다른 팀으로부터 태국선수들이 착하고 인사성도 바르다는 칭찬을 많이 받습니다.
-대표선수 선발에 전권을 쥐고 있죠?
▶2006년 이후부터입니다. 새로운 대표팀을 선발해 기존선수와 경합해 선발하는 방식입니다. 처음에는 대표선수가 90% 방콕에서 선발됐지만 이젠 전 지역에서 고루 선발될 만큼 폭이 두꺼워졌습니다. 한국처럼 태국도 국가대표가 되기가 그만큼 힘들어 졌죠. 겨루기 뿐만 아니라 품새 총감독도 맡고 있습니다.
-태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며 수상경력이 화려합니다.
▶2004년 왕실훈장을 받았고, 2005년 태국 외무부 장관이 주는 공로상, 2006년엔 총리상, 2007년엔 체육기자들이 선정한 최우수 지도자상, 2008년엔 씨암낄라 스포츠대상 및 명예의 전당에 올랐고, 2009년엔 태국 체육회 최우수 지도자상, 2010년인 지난해는 씨암낄라 스포츠대상을 또 받았는데, 이 상을 받은 외국인도 없지만, 2번 받은 사람은 없어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선수가 있나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땄던 야오와파라는 여자선수입니다. 집안이 가난했어요. 태권도를 하기엔 신체조건도 안 좋았고, 운동신경도 뛰어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대단한 투지의 소유자였습니다. 나와 직접 대련해서 입술이 깨지고, 치아가 흔들린 적도 있었는데,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다시 대련을 하자고 했어요. 이 친구 때문에 태국에서 지도력을 인정받게 됐으니, 어쩌면 나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렵게 자란 과정도 나와 비슷했습니다.
-장래성 있는 선수는 뭘 보면 알 수 있나요?
▶ 눈빛입니다. 이 선수는 올림픽감이구나 하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습니다. 2002년 아시안게임에서 태국에 첫 은메달을 안긴 뷰도 마찬가지였어요. 당시 뷰보다 경험도 많고 잘하는 선수가 있었어요. 그 선수와 겨루면 뷰는 번번이 졌죠. 하지만 나는 뷰의 눈빛을 보고 3개월만 가르치면 뛰어난 선수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됐습니다. 하지만 막상 아시안게임이 가까워지자 협회에서는 반대했습니다. 난 책임을 지겠다고 했고 뷰는 결국 해냈습니다.
-태권도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유단자 친구를 따라 도장에 갔다가 하게 됐습니다. 3~4개월 훈련했을 무렵에 전국대회가 있었는데 한 명이 빠져 대타로 출전하게 돼 동메달을 땄습니다. 태국 국가대표 감독도 `대타 코치’에서 시작했듯, 태권도 입문은 대타로 나가 홈런을 친 셈이었었죠. 그 덕에 성남 서중학교를 체육특기자로 입학했습니다. 중학교 때 까지만 해도 석차가 전교 5등 안에 든 적도 있었습니다.공부를 잘 했습니다. 대학교 졸업까지 성남을 떠나지 않아 성남 풍생고, 성남에 있는 경원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했죠. 집안이 어려웠는데 체육 특기생으로 대학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면제받고 다녔습니다. 강원대에서 체육학 석사를 받았습니다. 태국 카세삿대학에서 스포츠심리 박사과정을 마쳤습니다.
-어린 시절은?
▶집안이 어려웠습니다. 아버지가 내가 7세 때 돌아가셨어요. 위로 누나가 한 분 있는데, 어머니는 낮에는 공장일, 저녁엔 파출부 일을 하시면서 남매를 키웠습니다. 그것도 친구 집에서 파출부를 하셨는데, 지금도 가슴 아픈 기억입니다. 86 아시안 게임의 육상스타 임춘애씨가 초등학교 3년 선배에요. 신문에 라면 먹고 뛰었다고 나왔는데, 우리 집은 훨씬 더 가난했습니다. 어머니의 꿈은 아들이 교수가 되는 것을 보는 거였는데 태국에 오기 직전인 2002년 돌아가셨습니다. 29세 때 바레인에서 코치를 하다 1년 반만에 휴가를 받고 한국에 왔는데 그 때 쓰러져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 태국에 오면서 더욱 지독히 선수들을 가리 친 계기가 됐습니다.
-태권도 선수로서는 어땠나요?
▶전국대회 1등은 해봤지만 국가대표는 못해봤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한국에서 국가대표가 되는 것은 어렵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있다는 것이 언론에 종종 보도됐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몇 배의 연봉 제의를 받은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늘 태국에 감사하며 삽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해였는데, 그 해부터 이후까지 태국에서 많은 것을 이뤘습니다. 태국 사람들은 외국인이라고 차별 두지 않고, 동등하게 대해 줬으며, 과분한 사랑을 주었습니다. 가리킨 제자들을 상대로 타국에서 경쟁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 우선 부담이 되고, 태국인들을 대했던 처음의 그 불꽃 같은 열정을 가지지 못할 것이 두렵습니다.
-태국 태권도가 더 점프하려면 어떤 과제가 있을까요?
▶인프라가 더 확대되어야 합니다. 대표선수가 아니라도 선수층이 더 넓어야 합니다. 한국의 경우 아시안게임 선수 선발전에서 메달리스트들이 줄줄이 떨어지거나 고전합니다. 그만큼 선수층이 넓다는 뜻입니다.
-아들이 태권도 선수를 한다면 직접 가르칠 건가요?
▶지금 열세살인데 방과 후 태권도를 하고 있어요. 자기가 하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죠. 그런데 태권도 보다는 축구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태권도 감독인 제가 봐도 과연 태권도 선수로 소질이 있는지 아직은 확신이 안들어요.(웃음)
-태국과 태국인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20년을 태국 사람들과 살아왔습니다. 태권도를 통해 태국 문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태국은 최영석이란 이름을 알려줬고, 꿈을 심어줬고, 도전정신과 미래를 또한 안겨줬습니다. 태국이 나를 필요로 하는 그날까지 오로지 열심히 할 것입니다. 태국에서 한국과 한국인이 더 좋은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성적과 결과로만 말해주는 스포츠. 최영석 감독은 땀과 노력만 믿는 사람이다. 이국 땅 태국에서 그가 쌓아 올린 화려한 프로필의 이면엔 같은 부피, 같은 무게 만큼의 고통과 번민이 자리잡고 있었을 게 틀림없다. 오기의 한국인만이 견뎌내고 가능한 일이다. 선수는 물론 자신에 대해서도 혹독할 정도로 몰아 부치는 삶. 그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여전히 그 속에 자신을 가둬놓고 담금질하고 있다. 금메달 너머의 또다른 목표가 그에게 다시 손짓하고 있다.
특별인터뷰
정성희 사범
태국 왕실에 태권도 전파한 최초의 한국인 태권도 사범
태권도는 태국 곳곳에 깊숙히 파고들고 있다. 태국 국가대표 선수들의 잇단 승전보로 태권도가 빠르게 확산되는 한켠에는 왕실, 군부대 등 태국의 핵심 기관을 통해 수준 높게 보급되고 있다. 40여년간 태권도 도복을 입은 정성희 사범은 태국 왕실 경호부태, 태국 왕실 경찰사관학교를 비롯해 공주컵 태권도 대회 정례 유치로 태국 내 태권도의 품격과 긍지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주인공이다.
-태국 왕실 공주컵 국제 태권도대회를 유치하게 된 계기가 무엇보다 궁금하네요.
▶태국 지인의 소개로 10여년 전에 우연히 시린돈 공주님 생신에 초대받은 게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로도 몇번 초대받아서 가보니 비서진들하고 이야기할 시간이 많았습니다. 태국 공공기관에서 무료 태권도 수업을 꾸준하게 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며 도와야 할 것이 있는지 물어봐서 공주님 이름으로 태권도 대회를 만들고 싶다고 했습니다. 다음해부터 타이틀 허가서를 받아서 2011년부터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1회 대회 200명으로 시작해 현재 1천여 명 이상의 선수가 참가하고 2천여명의 관중이 관람하는 행사로 성장했습니다. 몇년 전부터는 주변국 및 전세계 10여국에서 참가해 명실공히 태국 왕실에서 인정한 태권도 공인 국제대회로 자리잡았습니다.
-왕실 경찰사관학교도 가르치고 있지요?
▶태국 왕실 경찰사관학교에서는 12년째 태권도 겸임교수를 맡고 있습니다. 나콘파톰(촘롬)의 태권도 클럽에서 특별활동 시간 중 20여 명으로 시작해 3년 만에 3학년 한 학기 정식 무도수업 4시간 과정이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태국인 태권도 사범이 중간중간 특별 시간에 가르쳤었는데 한국적 교육방식이 맘에 들어서인지 저를 무도시간에 투입해 짧은 시간에 강렬하게 태권도 수업을 진행하도록 하게 하고 있습니다. 첫 제자들은 벌써 각 경찰기관의 소령, 중령 급의 중간간부가 되었지요. 처음 수업 맡아 지도했던 국제 협력실장도 현재 교장선생님(한국의 치안정감)이 되어 학교 최고 수장이 되셨습니다. 2000밧 정도의 강의료는 담당 직원들 선물을 사주고는 했습니다. 2022년 8월부터는 한국 문화원의 도움으로 한국어 학당을 만들어 학생 및 교직원 50여명을 대상으로 후배 김광일 사범님이 한국어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왕비 근위대 2사단 21연대는 한국전쟁 참전부대로 현재까지도 한국전쟁 참전기념식을 1년에 몇차례 하는 부대입니다. 2010 이후 10년 이상 한인 사범연합회에서 무료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기간 동안 1년 반은 쉬었지만 매주 수요일 한국 참전에 대한 감사함을 담아 한인 사범님들이 돌아가며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싱가포르 방콕국제학교의 중학교 고등학교 체육수업에 태권도가 정식과목으로 채택되어 3년 이상 수업하고 있습니다.
▶2005년 캐리어 하나 들고 방콕에 왔습니다. 처음 6개월 간은 태국어를 공부했습니다. 이후 곧바로 방콕 스쿰윗 타임스퀘어 4층에 월드베스트 태권도 법인을 세웠습니다. 당시만 해도 법인 태권도 도장하는 분들은 안 계신 것으로 압니다. 송기영 사범님, 태국 국가대표 최영석 감독님, 후배 선교사님 몇분이 교회나 학교 특별활동시간에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었죠. 당시 태권도 도장 월세는250스케어 기준 12만 밧으로 태국사범들이 경영하는 태권도 도장 월세인 평균 2만밧 수강료 1000밧(지방 500밧) 보다 훨씬 비쌌습니다. 제가 문을 연 태권도 도장 수강료는 월 3500 -4000밧 이었습니다. 만만치 않은 수강료였지만 열정이 대단한 한국 사범이 왔다고 소문나면서 오픈 3개월 만에 50여 명이 등록했습니다. 옷, 가방, 시계에도 명품이 있듯이 태권도도 명품 도장, 명품 강의를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관광업계도 호황이었고 태국교민들 삶의 질도 높았던 시기였습니다.
-태국 정부기관 수업도 많이 하고 있죠?
▶처음 문을 연 도장이 안정된 1년 뒤 한국대사관의 소개로 UN 에스캅 본부에 태권도 클럽 사범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에스캅 역사상 본관 건물에서의 태권도 수업은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 무에타이, 유도, 가라데는 있었지만 태권도는 없었습니다. 입소문이 나면서 10명으로 시작한 강의가 금세 30명으로 불어났습니다. 2년째에는 안전요원들까지도 호신술로 태권도를 배웠습니다. 현재 건물 보수 공사로 중단됐지만 11년을 유엔 직원분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태권도 파급에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처음에는 젊은 혈기와 열정만으로 부딪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차츰 태국 정서와 태국인들의 습성을 알고부터는 먼저 소통하고 후에 추진하는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태국 경제, 사회 분위기, 자연재해 등 어려움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태권도의 강인함과 포기하지 않은 정신으로 최선을 다하고자 했습니다. 태권도 지도자로 한 우물만 파니 넉넉하지 못한 형편으로 가족에게 풍족하게 해주지 못한 미안함이 많이 있습니다.
- 태국에서 활동하는 한인사범들 및 한인사범 단체도 역할이 큰 것 같습니다.
▶태국 내 한인 사범수는30여 명입니다. 국가대표단을 지도하는 최감독과 한인사범님들, 경찰 군인, 마약청을 지도하는 재태국 한인사범님들, 장애인 태권도 단체를 지도 하는 신영균 감독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인 사범연합회는2007년 창립해 현재 30여 명의 한인사범 및 태국 사범님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권도를 원하는 태국 기관을 대상으로 무료 봉사하며 태권도 보급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 태권도를 위한 향후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나요?
▶40년 가까이 태권도 도복을 입었습니다. 20년간은 배웠고, 나머지 20년은 배우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태국 생활도 20년 가까이 되는 것 같습니다. 태권도 보급을 소명으로 생각합니다. 아직도 개발이나 발전이 필요한 태국 내 태권도 수련생 및, 공공기관 등에게 올바르게 태권도를 보급하고 싶습니다. 태권도는 선하고 강인하며 바른 정신으로 생활할 수 있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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