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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국 한인 70년사(8): 제 2부 재태 한인회의 발자취
 
  태국 한인 70년사(8): 제 2부 재태 한인회의 발자취  
     
   
 

국 한인 70년사-100년을 향한 전진’이 발간되었다. 태국에 한국인들이 어떻게 정착하고 살아왔으며 발전해 왔는가를 다루고 있다. 또 태국에 진출한 공기관과 각 기업, 언론, 종교단체, 한태교류의 역사, 태국내 주요한 한국인, 태국거주 한국인들이 태국에 대해 느끼는 설문조사, 태국의 각종 상식과 팁 등이 포함되어 있다. 발간된 책을 중심으로 일부 발췌해 소개한다. 통권은 재태국 한인회에 문의.

[1장]

 재태 한인회의 태동과 발자취

▶첫 한인회 ‘야자수회’

초창기 한인들은 1964년 ‘야자수회’를 조직했다. 이경손이 초대회장이 됐다. 오늘날 재태 한인회의 출발이었다. 부회장은 유엔기구에서 일하고 있던 김석건, 감사는 해운공사 태국 지사장이었던 진기복이 맡았다. 당시의 한인회는 친목도모의 성격이 강해 경조사 정도에 참가하는 상부상조의 목적이었다.

김석건 원로는 1927년 생으로 1960년대 태국에 처음온 뒤 한인회 1,2대 부회장을 맡고 1981년에는 한인회 11대 회장을 역임하며 재태 한인회의 시작과 발전과정을 낱낱이 지켜본 증인이다.

*재태 한인회 태동전인 1960년 태국에 출장 온 김석건(왼쪽 2번째)

그는 제 1대 한인회의 설립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에는 한인회라하지 않고 교민회라고 했다. 태국에 사는 한인들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어떤 친목모임 같은 것을 만드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처음으로 생긴 모임이 ‘야자수회’라는 것이었다.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남국의 정서를 나타내는 야자수의 이미지를 딴 것이었다. 야자수란 이름이 노래에도 자주 등장했다.

*야자수회 초대회장 이경손(1964)

당시 방콕에는 터줏대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박재기씨, 해운공사의 태국지사장으로 와 계시던 진기복씨, 무성영화에서 변사(辯士)역도 했고 ‘아리랑’ 영화의 감독까지도 했던 신사 이경손씨 등이 주요원로인사로 꼽혔다. 그 외에 하권모씨, 임진동씨, 황해연씨, 남상헌씨, 이종화씨, 이춘산씨, 조윤찬씨, 김춘식씨 등 원로 교포들이 계셨다. 그래도 명목이 회장선출이니 선거를 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나와 회장선거를 했다. 나는 이경손씨를 지지했다. 그 분의 폭넓은 대인관계가 우리 교민사회를 결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전부터 태국에 오래 사신 분을 밀어드려야지 왜 하필이면 다른 곳(중국)에서 온 분을 지지했느냐고 나에게 핀잔을 주기도 했다. 선거 결과는 이경손씨의 압도적 지지로 나타났다.

이경손씨는 야자수회 회장으로 당선되자 곧 나에게 부회장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사실 난 당시 유엔기구에서 근무하고 있어 야자수회하고는 직접적 또는 업무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태국생활을 하는 입장에서 교민사회에 나의 힘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해서 한인회의 초대 부회장 직을 수락했다.

이 후 한인회는 복수 부회장 제도를 도입해서 부회장직을 맡은 분들이 여럿 있지만 당시엔 부회장이 나 혼자였다. 회장이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나 회장을 대신하여 모든 일을 처리해야 했다. 그게 계기가 되어 이경손씨 뒤를 이어 한인회장으로 부임하셨던 박재기 회장 시절에도 부회장을 계속 맡았다.”

한인회 초기는 베트남 전쟁 기간으로 당시 태국은 파월 파월 한국군 장병들의 휴가지이기도 했다. 파월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한국 톱스타들이 출연하는 가운데 방콕의 에라완 호텔에서 장병 위문공연을 열렸으며 재태 한인회는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이경손 초대 한인회장은 한인대표로 환영사를 하기도 했다.

김석건 원로는 2대 회장인 박재기 회장에 대해서는 이렇게 회고 했다.

“박재기씨는 정말 태국의 한인사회에서는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말썽을 피우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으면 당장 불러서 혼을 냈다. 당시 방콕에는 유엔기구에서 장학금을 받고 공부하던 외국어대학교 손병순 이라는 학생이 있었다. 콜롬보플랜에 따라 유엔에서 지급되는 장학금이었는데 한 달에 미화로 50달러 정도로 아무리 태국 물가가 쌌다 하지만 생활하기에는 참 어려웠다. 이경손 회장이나 박재기씨 같은 분들은 타국에 와서 공부하느라 고생한다고 손병순씨를 자주 그분들 집으로 불러 같이 식사를 하곤 했다. 태국에 처음으로 한인회가 결성되고 회장과 부회장이 정해졌지만 정작 한인회를 운영할 회칙이나 정관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모두들 친목모임으로 만났기 때문이었다. 만나서 주로 하는 이야기도 누구누구 집의 경조사나 아니면 건강을 챙기는 일들이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모임의 성격이 점차 공식화되자 무슨 회칙이라도 있어야 되는 게 아니겠느냐는 의견이 나와 그 자리에서 내가 종이에다 손으로 회칙이라는 걸 썼다. 그게 한인회의 맨 처음 회칙이다. 그 뒤 여러 차례 회칙이 바꿔져서 지금의 한인회 정관이 된 것이다.”

▶재태 한인사회 초석을 다진 박재기 회장

*박재기 회장

2대 박재기 한인회장은 별세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재태 한인사회에서 추앙되며 기억을 소환시킨다.

그의 사진이나 기록조차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게 아쉽지만 해방 후 초기 한인사회를 말하는 재태 한인사회의 원로들은 그를 태국 한인사에 뼈대를 세운 인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재태 한인회의 1대 회장은 이경손이 맡아 1964년 한해를 역임했지만 박재기 회장은 이듬해인 1965년부터 1975년까지 내리 10년간 한인회를 이끌었고 1977년부터 3년간 다시 한인회장을 역임했다. 재태 한인회의 역사상 최장기간, 최다선 회장이었다.

이철희(1943년생), 박선호(1947년생), 황경선(1955년생) 세분의 재태 한인원로가 스쿰윗 한인회 사무실에 모여 고 박재기 회장을 떠올리며 긴 대화를 이어가며 그를 추억했다. 45년전 박재기 회장이 동분서주하며 재태 한인 후세들을 위해 구입한 바로 그 곳이었다.

-지금 한인회 건물을 구입한 것이 박재기회장 때 였지요?

박선호: 1977년 박재기 회장이 두번째 한인회 회장의 임기를 시작하는 첫해였어요. 한인회에서 모아둔 돈이 20만 밧이 있었는데 파이롯의 고홍명 회장이 20만 밧을 기부했지요. 하지만 한인회관 후보지 가격이 60만 밧을 호가해 박재기 회장이 백방으로 모금해(특히 방태 인사들 대상) 20만 밧을 추가해 구입하게 되었지요. 당시 저는 파이롯의 방콕 법인장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방콕 로열스포츠클럽 멤버가 되고 보니 이미 대사, 공사를 비롯한 원로교포 박재기 회장과 지백산 진기복 권오찬 김석건 고홍명 회장 등이 친교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당시 막내인 저는 귀여움을 받으며 원로분들의 교민사회에 대한 사랑과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박재기 회장을 추억하는 한인 원로들 왼쪽부터 황경선, 이철희, 박선호 원로

-박재기 회장은 2차대전 때 일제 학도병으로 태국에 온 것인가요?

► 이철희: 일제가 콰이강의 다리를 건설할 때 군속이라고 들었습니다. 해방 후 귀국선에 오르지 않은 분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초창기 태국에 남은 한국인들이 여권이 있을리 없고 신분보장도 안됐지요.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박재기 회장은 당시 한인사회 연장자로 엄한 어른이었지만 곤궁한 사람들에게는 온정을 베풀었다고 들었습니다.

►황경선: 한마디로 타고난 리더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박선호: 체구가 크고 목소리가 우렁찼습니다. 한국에서 방문객들이 오면 기부금 모금 을 지속적으로 설득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박회장님때 한인회 건물 구입과 토요학교 설립 등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한인회가 건물매입을 위해 축적했던 20만 밧도 오로지 박회장님 노력의 결과물입니다. 당시 20만 밧이면 지금은 20배 이상의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더 될까요?

-식수 정화사업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박선호: 정확히 말하면 얼음공장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한테도 ‘얼음 먹지마라 그다지 깨끗하지 않다’는 말씀을 하셨어요.(웃음) 택시도 타지 않고 대부분 걸어다니셨던 것 같아요.

► 이철희: 아, 그거야 거리에 따라 다르겠지요. (일동 웃음) 저는 당시 어렸고 막내였지만 그분의 업적을 떠나 인간적인 면에 대해선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 시작된 토요학교가 지금까지도 태국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한국 청소년들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박선호: 학교를 세우려는데 비용이 없다며 지원을 해달라는 요청을 곳곳에 자주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박재기 회장의 열정은 한인회관 마련 뿐만 아니라 2세 자녀교육에도 열성적이었습니다. 자체 교육시설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토요한글학교를 활성화 시키기 위한 모금을 계속했고 결국은 문교부(현교육부)에 탄원해 일정 보조금을 정기적으로 수령하게 했습니다. 한인회 소속 정식 한인학교를 세우기까지 펫부리의 돈보스코 직업학교에서 한인학교를 운영하게 되었죠.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본인의 세자녀도 그때 배운 한국어 실력으로 지금까지 한국어를 할 수 있게 된 것을 늘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 이철희: 관련해서 태국 각 대학에 한국어과가 생기게 된 배경이 생각납니다. 제8대 회장인 임진동 회장때 한국어과가 창설됐는데 20만밧을 모아 태국 교육기관에 기증했었습니다.

► 황경선: 지금의 한인사회를 이룬 여러분들이 계시지만 박재기 회장님은 누구할 것 없이 존경하고 기억하는 어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재기 회장은 1998년 1월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으며 2000년 6월 14일 별세하자 첫 한인회장으로 치러졌다.

▶ 한인회의 대를 이은 과제, 참전용사 보은과 2세 교육

한인사회 초창기의 인물 중의 한명인 임진동은 1976년 제 8대 한인회장에 취임했고, 한인회 1,2대 부회장이었던 김석건은 박재기에 이어 제 11대 한인회장을 역임했다.

김석건은 박재기 회장이 구입한 한인회 건물을 등기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태국 방문때는 환영사를 하는 등 재태 한인사회에 이정표를 많이 남겼다.

특히 한인 2세들을 위한 교육에 골몰했다. 교육시킬 마땅한 학교가 없자 한국대사관 차고 안에 칠판을 걸어놓고 한글교육을 시작했다. 오늘날 방콕한국국제학교는 초창기 한인들의 소망이 모여서 이뤄진 결실이라고 할 수있다.

*1968년대 대사관 정원에서 열린 어린이날 교민행사 *1974 리틀엔젤스 공연단 방콕방문

제 14대 김진혁 한인회장때는 재태 한인회가 사단 법인으로 정식 등록됐다. 베트남 전쟁 후 베트남에 진출했다 1972년 태국으로 이주한 임완근은 1991년부터 1992년까지 제 16대 한인회장을 역임했다. 25년 뒤에는 그의 아들 임부순이 제 30대 한인회장에 선출되면서 재태 한인사 처음으로 부자 한인회장이 탄생하기도 했다.

제 17대 강규진(1993-1994년), 18-19대 안홍찬(1995년-1998년), 20대 최도윤(1999년-2000년) 회장을 거치는 동안 재태 한인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한인들이 종사하는 직업도 다양해졌다.

역대 한인회장들은 6.25 전쟁 때 한국을 도운 참전용사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강규진 회장은 방콕 돈므엉 인근의 고아원을 방문하며 보은의 발걸음을 걷기 시작하였다. 안홍찬 회장의 한인회는 처음으로 참전용사 협회에 장학금을 전달했다. 이 뿐만 아니라 한인회는 태국사회와 함께 호흡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태국사회의 그늘진 곳을 살피는 활동도 이어나갔다.

*코리아페스티벌의 개회사를 하는 전용창 회장(왼쪽) 김장열 회장은 푸미폰 국왕의 훈장을 받았다.

김석건 원로 등 재태한인 원로들은 가장 저돌적으로 업무를 추진했던 인물 중의 한명으로 20대(1999-2000년) 최도윤 회장을 꼽는다. 최도윤 회장은 자신이 하던 여행사업을 모두 아들에게 물려주고 회장 임기 중에 다양한 사업들을 개발하여 추진했다. 방콕한국국제학교 설립을 추진했고, 그를 이은 전원수 한인회장(2001-2003년)은 교육인적자원부의 인가를 받아, 방콕 한국국제학교가 마침내 교사 신축공사에 들어갔다.

▶ 한국인의 온정과 한류 전파한 재태 한인회

2000년 이후 한인회는 태국 사회 깊숙이 파고 들었다. 곳곳에서 한국과 한국인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활발한 활동을 이어 나갔다.

태권도 사범이었던 송기영 회장이 한인회를 이끌던 2003-2004년 태국 곳곳에 태권도가 파급되며 인기를 끌었다. 1972년 12월에 태국에 온 송기영 회장은 로열스포츠클럽에서 태권도를 가리키며 태국 태권도 인구 확산의 결정적 발판을 마련했다. 1975년 태국 태권도 학교가 설립되고 이후 2만여 명의 태권도인이 배출됐다. 태권도 보급에 따른 저변확산으로 최영석이라는 걸출한 태권도 코치가 태국 태권도국가대표 팀에 부임하며 태국은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동메달을 수확하는 쾌거를 이루게 된다.

2004년 12월 26일 태국 남부에 쓰나미가 발생하자 재태 한인사회는 한인회를 중심으로 구호활동에 적극 나섰다. 당시 김장열 한인회장은 쓰나미가 발생한 며칠 뒤인 2005년 1월 1일 새벽 첫 비행기를 타고 푸켓으로 날아가서 희생자들의 장례식과 영결식으로 한인회장 첫 임기를 시작할 정도였다. 한인들은 수백구가 넘는 희생자들의 시신을 넘나들며 구호품을 전달하고 봉사활동에 나섰다.

김장열 회장은“쓰나미는 태국인들에게 한국은 따뜻한 이웃이며 태국사회의 일원이라는 모습을 보여준 때라고 생각한다. 모금활동을 시작해서 삼성, LG, 현대 등을 비롯한 각 기업체에서 6억 원에 상당하는 물품과 구호기금을 마련했고 다방면으로 지원활동을 했다. 재태 한인회에서도 현금 1백만 밧을 모아서 그 당시 수상이었던 탁신 총리에게 한인회 간부들과 함께 전달했다”고 말했다. 쓰나미 구호활동으로 당시 푸미폰 국왕은 재태 한인사회를 대표한 김장열 한인회장에게 국왕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김장열 회장은 한인회 사무실을 한인 문화회관으로 개축하기도 했다.

2008년은 한-태수교 50년의 해였다. 제 25대 전용창 한인회장이 중심이 된 재태 한인회는 한-태수교 50주년을 기념하는 태국 내 첫 종합한류 축제를 방콕 중심부인 시암패러건에서 화려하게 개최했다.

유명 한류스타가 방문하고, 한복 패션쇼 및 양국 문화공연, 양국 대중가수들의 무대가 큰 화제가 되며 한류확산에 촉매제가 됐다. 태국 왕실을 방문해 한국의 문화와 종교를 알렸고, 국립 쭐라롱꼰대학 축제에는 ‘한국의 날’ 행사를 개최해 태국 젊은세대에게 한류가 전해지는데 일조했다. 태국 고아원 방문 등 그늘진 태국사회에 한국인의 온정을 전달하는 행사도 역대 한인회를 이어 다수 개최됐다.

2010년(박종각 회장)에는 시린돈 공주가 방콕 스쿰윗 상가를 방문하고, 제 1회 공주컵 국제태권도대회가 열렸다. 1년 뒤인 2011년(김형곤 회장)에는 태국 국토의 75%가 물에 잠기는 대홍수가 발생했다. 한인들은 상부상조하며 태국 수재민 지원에도 발벗고 나섰다. 2013-2016년 동안 한인회장을 연임한 채언기 회장은 재태국 청소년들을 위한 꿈나무 한마당을 개최해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대규모 한마음 체육대회가 열려 태국내 한인의 결집을 드러내고 확인하기도 했다.

*위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교민백신 지원활동, 6.25 참전용사 행사

1990년대 초반에 시작된 6.25 전쟁 참전용사에 대한 보은행사는 한인회를 중심으로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2017년(임부순 회장)에는 한국전 참전마을에서 한가위 잔치가 열려 태국 및 한국을 동시에 훈훈하게 했다.

 2019-2020년(황주연 회장)에는 코로나19 피해가 큰 경북지역에 구호성금을 전달해 세계 한인회의 모범사례로 기록됐다. 관광업이 끊기자 곤란에 처한 태국 내 교민을 위해 한인회는 생계키트 지원을 시작했다. 생계기트 지원은 방콕 뿐만 아니라 치앙마이 등 지역한인사회에서도 다수 실시돼 고통을 나누었다.

*방콕한국국제학교 새 교정

재태 한인과 역대 한인회가 공을 들인 숙원사업이었던 방콕한국국제학교도 2020년 7월 마침내 도심 중심에서 가까운 곳에 새교정을 갖는 꿈을 이뤘다. 방콕다운타운에서 2시간 걸리는 외곽 농촉에 있다가 도심에서 보다 가까운 람인트라로 이전한 것이었다.

보다 넓은 새 학교 전용부지 매입 등의 과제가 여전히 남아있지만 장기간의 등하교로 파김치가 됐던 아이들이 기를 펴게 되면서 학생들도 몰려들었다. 전교생 90명이 채 안 됐던 학생들은 이전 2년도 안 돼 140명으로 증가했다. 재태 한인들은 30여 업체 이상이 ‘후원의 집’프로젝트에 참여해 재정적 도움을 주고 있다.

2020년 3월 이후 태국이 국가봉쇄를 선언하며 2년여간 계속된 코로나 사태로 재태 한인사회는 직격탄을 맞았다. 특히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가운데 태국의 자국민 우선 백신접종 정책은 재태 한인회들은 무방비 상태에 노출됐다. 재태 한인회는 태국에 진출한 어떤 외국 교민사회보다 앞서 한국교민 단체 무료 백신접종을 이끌어내고, 이후 태국 병원과의 MOU 체결을 통해 재태 한인 안전확보와 편의에 나서고 있다.

Thai Tip

프랑스의 부이야베스, 중국의 샥스핀과 함께 똠얌꿍은 세계 3대 수프로 인정받는다. 태국어로 ‘똠’은 끓이다, ‘얌’은 새콤하다, ‘꿍’은 새우를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