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기 회장은 2차대전 때 일제 학도병으로 태국에 온 것인가요?
► 이철희: 일제가 콰이강의 다리를 건설할 때 군속이라고 들었습니다. 해방 후 귀국선에 오르지 않은 분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초창기 태국에 남은 한국인들이 여권이 있을리 없고 신분보장도 안됐지요.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박재기 회장은 당시 한인사회 연장자로 엄한 어른이었지만 곤궁한 사람들에게는 온정을 베풀었다고 들었습니다.
►황경선: 한마디로 타고난 리더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박선호: 체구가 크고 목소리가 우렁찼습니다. 한국에서 방문객들이 오면 기부금 모금 을 지속적으로 설득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박회장님때 한인회 건물 구입과 토요학교 설립 등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한인회가 건물매입을 위해 축적했던 20만 밧도 오로지 박회장님 노력의 결과물입니다. 당시 20만 밧이면 지금은 20배 이상의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더 될까요?
-식수 정화사업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박선호: 정확히 말하면 얼음공장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한테도 ‘얼음 먹지마라 그다지 깨끗하지 않다’는 말씀을 하셨어요.(웃음) 택시도 타지 않고 대부분 걸어다니셨던 것 같아요.
► 이철희: 아, 그거야 거리에 따라 다르겠지요. (일동 웃음) 저는 당시 어렸고 막내였지만 그분의 업적을 떠나 인간적인 면에 대해선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 시작된 토요학교가 지금까지도 태국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한국 청소년들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박선호: 학교를 세우려는데 비용이 없다며 지원을 해달라는 요청을 곳곳에 자주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박재기 회장의 열정은 한인회관 마련 뿐만 아니라 2세 자녀교육에도 열성적이었습니다. 자체 교육시설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토요한글학교를 활성화 시키기 위한 모금을 계속했고 결국은 문교부(현교육부)에 탄원해 일정 보조금을 정기적으로 수령하게 했습니다. 한인회 소속 정식 한인학교를 세우기까지 펫부리의 돈보스코 직업학교에서 한인학교를 운영하게 되었죠.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본인의 세자녀도 그때 배운 한국어 실력으로 지금까지 한국어를 할 수 있게 된 것을 늘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 이철희: 관련해서 태국 각 대학에 한국어과가 생기게 된 배경이 생각납니다. 제8대 회장인 임진동 회장때 한국어과가 창설됐는데 20만밧을 모아 태국 교육기관에 기증했었습니다.
► 황경선: 지금의 한인사회를 이룬 여러분들이 계시지만 박재기 회장님은 누구할 것 없이 존경하고 기억하는 어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재기 회장은 1998년 1월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으며 2000년 6월 14일 별세하자 첫 한인회장으로 치러졌다.
▶ 한인회의 대를 이은 과제, 참전용사 보은과 2세 교육
한인사회 초창기의 인물 중의 한명인 임진동은 1976년 제 8대 한인회장에 취임했고, 한인회 1,2대 부회장이었던 김석건은 박재기에 이어 제 11대 한인회장을 역임했다.
김석건은 박재기 회장이 구입한 한인회 건물을 등기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태국 방문때는 환영사를 하는 등 재태 한인사회에 이정표를 많이 남겼다.
특히 한인 2세들을 위한 교육에 골몰했다. 교육시킬 마땅한 학교가 없자 한국대사관 차고 안에 칠판을 걸어놓고 한글교육을 시작했다. 오늘날 방콕한국국제학교는 초창기 한인들의 소망이 모여서 이뤄진 결실이라고 할 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