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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한인 70년사(4): 제 1부 태국 한인 진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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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한인 70년사(4): 제 1부 태국 한인 진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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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한인 70년사-100년을 향한 전진’이 발간되었다. 태국에 한국인들이 어떻게 정착하고 살아왔으며 발전해 왔는가를 다루고 있다. 또 태국에 진출한 공기관과 각 기업, 언론, 종교단체, 한태교류의 역사, 태국내 주요한 한국인, 태국거주 한국인들이 태국에 대해 느끼는 설문조사, 태국의 각종 상식과 팁 등이 포함되어 있다. 발간된 책을 중심으로 일부 발췌해 소개한다. 통권은 재태국 한인회에 문의.
[4장]
태국 한인 도전과 기회의 시대(2000-현재)
▶새천년, 다원화된 한인사회와 한류
새천년이 시작되며 태국 한인사회는 한층 더 다원화됐다. 대기업은 물론 각종 공기관을 비롯, 소비재와 서비스 업종의 진출이 왕성해졌다. 앞선 시대와는 사뭇다른 ‘호재’가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한류다.
2000년대 초반 TV 드라마로 시작된 한류는 재태 한인사회 삶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이중 소비재 분야에 미치는 효과는 절대적이었다.
2010년 이전까지를 한류의 개화기라고 한다면 2010년 이후는 만개의 시기였다. 한국인의 위상은 높아졌고 한국 브랜드의 인기는 날로 상승했다.
태국인에게 한국은 깨끗하고 스마트한 나라이자 IT의 강국이었다. 한류가 미치는 영향력은 실로 막대해 한국을 찾는 태국 관광객이 급증했고, 한국어의 인기가 치솟아 전세계 한국어를 배우는 인구의 25% 이상이 태국인으로 분석되기도 했다. TV만 틀면 나오는 한국드라마, 1주일을 거르지 않고 열리는 K-POP 콘서트와 팬미팅 등의 영향이었다.
중국과 일본에서 험한류와 항한류가 제기됐지만 개방적인 태국은 한류의 새로운 전진기지로 부각되며 진화와 증폭을 이어갔다. 패션, 미용, 화장품 등의 한국 소비재는 물론 한국형 프랜차이즈의 진출로도 이어졌다. 각종 화장품 브랜드들이 진출했고, 드라마에서 연예인이 착용해 인기를 끈 컬러렌즈가 1년 만에 2천배 이상 성장한 경우도 있었다.
여학생들은 K-POP 걸그룹의 헤어스타일로 학교측의 훈육 방침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태국 수상이 드라마 ‘태양의 후예’ 애시청자라며 공개했고, 또 다른 수상은 딸이 한국어를 부전공으로 공부하고 있다고도 밝히기도 했다. 방콕 한인상가를 방문한 태국 공주는 드라마 ‘선덕여왕’을 언급하며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해방전 일본에 강제징집돼 모진 수난과 고통을 겪었던 한인 1세대, 그리고 6.25 전쟁때 태국의 원조를 받던 헐벗은 한국의 흔적은 더이상 태국에 남아있지 않았다.
태국 상점에서 한국제품을 팔면서 ‘픙 마짝 까올리(막 한국에서 왔어요)’란 문구로 마케팅을 펼치거나 백화점 식품코너마다 작은 태극기가 붙여 있는 것은 더이상 주목할 만한 일도 아닌 오늘이 됐다.
한류가 태국에 짙은 안개처럼 드리우는 사이 태국의 정치, 환경적 요인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새천년으로 들어서며 태국은 2,3년 단위로 큰 재난과 정치적 불안이 갈마들었다. 재태 한인들도 시련앞에 놓였다.
2004년 쓰나미를 시작으로2006년 군사쿠데타, 2008년 공항폐쇄, 2011년 대홍수, 2013년 방콕 셧다운과 유혈시위, 2014년 또다시 군사 쿠데타, 2020년 초부터 시작된 코로나 등이 이어지며 서비스업 의존도가 높은 한인사회는 후퇴와 전진의 쳇바퀴를 거푸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단 것이다.
태국 군사정권이 들어선 뒤 2014년 7월부터 강화된 ‘비자런’의 단속은 재태한인들의 줄이은 본국 귀환을 부채질했다. 설상가상 2019년 말부터 시작된 코로나는2020년 3월 이후 태국의 전면적인 국가봉쇄로 이어져 한인사회도 태국진출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
*2006년 쿠데타를 발표하는 태국 육군참모총장. 오른쪽은 정정불안속에 열린 2008년 코리아 페스티벌
관광객의 격감, 방역지침에 따른 영업제한 조치는 관광업과 서비스업에 종사해온 태국 한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직격탄이었다. 한인의 수가 줄었고, 잘 나가던 프랜차이즈, 음식점 등도 문을 닫아야 했다. 한인사회는 코로나를 전후로 또다른 ‘역대급 위기’에 봉착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인 1세대가 굳센 개척정신과 인내로 태국에 뿌리를 내렷듯이 태국 한인사회는 또다른 출발선에 서길 주저하지 않고 있다. ‘위기 속의 기회’라는 말이 있듯 한류의 열기는 식지않으며 성공의 디딤돌을 딛는 젊은 창업가들도 등장하고 있다.
2000년 이후 정치적 격변과 화난이 이어진 태국은 재태 한인들에게는 시련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새 질서를 주도할 기회의 시대이기도 했다.
▶태국 격변기 재태 한인들(2000-2010)
새천년 들어 2004년 푸켓 쓰나미는 한인 사회의 존재를 태국에 알린 계기가 됐다.
쓰나미가 발생하자 재태 한인사회는 한인회를 중심으로 구호활동에 적극 나섰다
삼성, 엘지, 현대 등을 비롯한 각 기업체에서 6억 원에 상당하는 물품과 구호기금을 마련했고 다방면으로 지원활동을 했다. 재태 한인회에서도 현금 1백만 밧을 모아서 그 당시 수상이었던 탁신 총리에게 한인회 간부들과 함께 전달하기도 했다.
쓰나미 2년 뒤인 2006년 9월에는 태국의 18번째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탁신 총리가 UN 연설차 뉴욕에 가 있는 사이 군사 쿠데타가 터진 것이었다. 옐로셔츠와 레드셔츠 시위대가 격렬하게 대립하며 태국 사회 혼란이 극에 달했다.
쿠데타 6개월전 제18대 대한민국대사로 태국에 부임한 한태규 대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태국 외교부로부터 밤 10시쯤 쿠데타가 일어나 정부건물을 모두 장악했다는 긴급전화를 받았다. 공관 비상연락망을 통해 전직원 비상대기 후 교민 안전대책을 강구했다. 지역 한인회, 동포단체에도 바쁘게 연락을 취했다. 쿠데타 다음날 오전 외교관들에게 브리핑을 할테니 상황실로 들어오라는 전갈을 받고 들어갔다.”
태국 정권이 갈마드는 사이 2008년은 한-태수교 50년의 해였다.
드라마로 시작된 태국 한류의 열기가 레인, 동방신기 등 K-POP 가수들의 대형공연으로 이어지며 한국 대중문화 컨텐츠가 전분야로 확산되고 있었다.
한-태수교 50주년을 기념하는 태국 내 첫 종합한류 축제가 재태 한인회의 주최로 방콕의 중심부인 시암패러건에서 화려하게 개막돼 유명 한류스타가 방문하고, 한복 패션쇼 및 양국 문화공연, 양국 대중가수들의 무대가 큰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2008년 말해는 사상초유의 또다른 환란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탁신의 옐로셔츠가 수완나품공항을 점령해 국제공항이 폐쇄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재태 한인들은 관광객의 유치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한국인을 고국으로 빨리 돌려보낼 수 있을까에 고민했다. 공항 폐쇄직전인 2008년 10월 제19대 대사로 부임한 정해문 대사는 “공항이 폐쇄된 줄 모르고 혹시라도 공항에서 항공편을 기다리는 한인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소식에 늦은 몇 명의 한인들을 공항에서 데려나와 대사관 근처 안전한 호텔로 임시 대피시키기도 했다. 십시일반 음식지원도 했다. 호텔에 전화해 투숙 관광객 현황을 파악하게 한 후 이들과 비상연락망을 유지하도록 하면서 임시 항공편 투입 문제를 본국과 협의했다.”
2008년 치앙마이와 푸켓에는 명예 영사관이 처음 설치되기도 했다.
2009년 4월 아세안 관련 정상회담에 참석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은 시위대의 행사장 난입으로 하루만에 돌아가는 일도 발생했다.
그 당시 역시 대사였던 정해문 대사는 “아세안+ 한.중.일 정상회의와 동아시아정상회의 참석을 위해서는 다른 호텔로 이동해야 하는데 불가능해 보였다. 우리 대통령은 일본 총리와 같은 숙소 호텔에서 양자 정상회담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메모지 한 장 정리하여 한-일정상회담장으로 뛰어 들어가 대통령에게 남은 아세안 관련 정상회의 일정이 모두 취소되었다는 아피싯 총리의 발표문을 보고하였다.”
일촉즉발의 혼란이 이어졌던 태국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태국내 한국의 인지도는 고공비행을 계속했다. 태국의 정치적 갈등 속에서도2008-2009년 2년 간 태국 지상파 TV에서만 역대 최대인 무려 86개의 한국드라마가 방송됐다. 주요방송 황금시간대는 한국드라마가 독차지했고, ‘한국적인 것’이 크게 유행했다. 정치에 실망한 대다수 태국인들을 TV화면 앞에 불러 모은 것은 아니었을까? 재태 한인사회의 자부심은 크게 늘었고 재태 한인사회는 더 다채로워졌다.
2000년 이후 태국 사회의 주요 일지
►2001년 6월 타이락타이(TRT)당 총선 압승, 탁신 총리 취임
►2004년 12월 남부 푸껫 등에 쓰나미 발생
►2006년 9월 군사 쿠데타
►2007년 5월 헌법재판소, TRT 등 4개 정당 해산 명령
►2008년 12월 국제공항 폐쇄, ‘아세안+3 정상회의’ 취소
►2010년 4월 반정부 시위, 방콕시내 총격전 91명 사망
►2011년 9월 대홍수, 사망자 602명, 수재민 402만 가구
► 2012년 정정불안, 반정부유혈시위 지속
► 2014년 1월 방콕 셧다운 시위, 5월 군사 쿠데타, 비자런 단속
►2016년 10월 푸미폰 국왕서거
►2019년 3월 총선
►2020년 코로나로 3월부터 국가전면 봉쇄
►한류의 확산, 기회의 태국(2010-현재)
2000년 초반 시작된 한류는 2010년을 거치면서 더 뜨거워졌다.
반면 태국사회의 분열은 더 심화됐다. 탁신 정부를 몰아낸 군부세력의 집권 후에도 정치적 불안정은 지속됐다. 2010년 4월에는 시내 백화점이 불타고 총격전이 벌어지며 90명이 넘게 사망했다. 한인 일부는 짐을 꾸려 태국을 떠나기도 했다. 급기야 2011년에는 전국토의 70% 이상이 잠긴 대홍수가 발생했다.
그러나 반정부 시위도, 홍수 속에서도 한국대세는 유지됐다. 홈쇼핑을 비롯해 톰앤톰스, 할리스커피, 설빙 등의 빙수류 등과 같은 한국 음료 및 라면 및 즉석제품 등 K-FOOD 소비가 크게 늘었고, 각종 한국 브랜드의 인기가 치솟았다.
톰앤톰스는 최초로 24시간 영업제를 도입하기도 했다. 한국브랜드라고 하면 일단 한수 먹고 들어가는 분위기 였다고 한다. 톰앤톰스 김지용 법인장은 “커피값이 없는 젊은 친구들은 카운터 앞의 컵이라도 가져 가려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탁신을 지지하는 시위대. 2000년대 이후 태국은 친탁신과 반탁신의 대립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류 브랜드의 부침은 싸이클이 짧아졌다. 한국 빙수가 곧 태국 로컬업체들과의 경쟁에 맞닥뜨린 것이 한 예이다. 2012년에는 한국농수산식품 유통공사(aT) 방콕 사무소가 개소됐다. K-푸드가 K-POP, K드라마에 이은 한류의 큰 테마 중 하나로 떠오른 가운데 동남아 소비 트렌드 리딩국가이자 세계인의 주방이라 불리우는 태국내 한국 농식품의 우수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소비를 확산시키는데 목표를 뒀다.
태국에 큰 재난이 닥칠때마다 한인사회는 아픔을 함께 나누며 소통했다. 대홍수에 부임한 임재홍 대사는 2011년을 이렇게 회고 했다. “대사 부임 후 한달만에 홍수가 왔다. 처음에는 한국 장마와 비슷하거니 생각해 1주일이면 끝날 것으로 생각했는데 두달 가까이 이어졌다.
북쪽에 많이 내린 비가 완만한 국토를 흘러 남쪽으로 오면서 이어진 홍수니 한마디로 ‘햇볕 쨍쨍한 날의 홍수’ 였다. 곳곳에 구호물품을 전달하러 많이 다녔다. 지금도 (태국어)로 파이팅이라는 뜻의 태국어 ‘쑤쑤’가 생각난다. ‘쑤쑤’만 계속 외치고 다닌 것 같다.”
군부가 들어선 뒤 외국인 불법체류 단속이 개혁조치의 하나로 이뤄졌다. 재태 한인들의 ‘비자런’이 문제가 되었다. 주재국의 합법적인 법 집행을 문제 삼을 수는 없었지만 미처 대비하지 못한 한인사회에 큰 혼란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2013년 7월에는 방콕에 한국문화원이 개원했다. 태국의 한국문화원은 동남아에선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에 이어 4번째이며 전세계적으로는 25번째였다. 방콕 중심부이자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스쿰빗에 위치한 한국문화원은 지상 3층, 1,351㎡ 크기의 규모로 150석 규모의 공연장 `한마당’, 상설전시를 위한 `전통문화관’, 강의실로 사용되는 `세종실’, `훈민정음실’과 귀빈 접견용의 `사랑방’과 한식 강좌를 위한 `요리강좌실’ 등을 갖췄다.
►한류의 끝판왕, 한국어 교육
한류와 함께 시작돼 가장 돋보이는 전진을 이룬 분야는 한국어 교육이다. 이는 재태 한인사회 뿐만 아니라 한인 2, 3세들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11년 신학기부터 태국 중등학교에 60여명의 한국어 교사가 처음 파견됐는데 주태 한국대사관에서는 여러명의 대사들이 10년 가까이 바통을 이어가며 태국내 한국어 파급에 전력을 기울였다. 한국어는 2018년 마침내 태국 대학입시의 제 2외국어 선택과목으로 채택됐다.
2022년 대학 입시에서는 일본어를 제치고 중국어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태국 학생들이 한국어를 제2 외국어로 선택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전세계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청소년의 4분의 1이 태국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와 관련 노광일대사(2015. 11-2018.11 재임)는 “한국어의 제2외국어 채택은 가장 보람있는 일로 기억한다. 재임시절 태국 총리, 부총리, 대법원장 등 누구를 예방하든지 한국어의 제2외국어 채택을 의제삼아 말했다. 외무부를 방문할 때는 직원들로부터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한국어 이야기는 너무 강조하지 하셨으면 좋겠다’는 말도 들었을 정도였다”며 “한류의 ‘끝판왕’은 한글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재태 한인들의 염원을 담아 방콕한국국제학교는 2020년 7월 마침내 새교정을 갖는 꿈을 이뤘다. 방콕다운타운에서 2시간 걸리는 외곽 농촉에 있다가 도심에서 보다 가까운 람인트라로 이전한 것이었다. 등하교로 파김치가 됐던 아이들이 기를 펴게 되면서 학생들도 몰려들었다. 전교생 90명이 채 안 됐던 학생들은 이전 2년도 안 돼 140명으로 증가했다.
1990년대 전후 태국에 폭발적으로 증가한 한인들의 2세들이 2010년 이후 청소년 성인이 되어태국 사회에 진출하고 있는 것은 또다른 한인사회의 큰 변화이다.
태국에서 태어나 성장한 이들은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을까?
2006년생으로 태국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박서연 양은 한국어 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대학은 한국으로 가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그 이유는 한국부모의 교육과 한류의 영향 때문이다.”
“토요학교에 다니며 한국 마인드가 생겼다. 한류 덕분에 친구들 사이에서도 늘 유리했고 주목받았다. 고학년으로 올라 갈수록 더 그랬다. 태국 친구들이 한글이나 한국음식 K-POP도 물어봤다. 한국인에 대한 정체성에 의문이 든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한국 드라마나 웹툰을 보면서 언제부터인가 한국에 대한 ‘로망’이 생겼다. 그래서 대학도 한국으로 가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2002년 생으로 한국인인 아버지와 태국인 어머니 사에서 태어나 태국에서 자란 윤나라 양도 한국인의 성향이 강하다. 한국과 태국여권 두개 다 가지고 있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태국학교 방학이면 한국에 가서 공부하고, 드라마 내용이나 한국스타들의 SNS에 올라온 한글을 태국 친구들에게 알려주면서 태국에 살면서도 ‘한국 정체성’이 시나브로 스며든 케이스다. 영어 태국어를 잘 구사하는 윤나라 양은 “혼혈은 기회”라고 말했다. 노광일 대사의 ‘한류의 끝판왕’은 한국어라는 말과 일맥 통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이는 1960년대 초반 한인원로인 김석건 회장이 대사관 주차장에 칠판을 걸고 마련한 한글학교를 통한 한국어 교육이 50년 넘게 면면히 이어져 온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로나 위기, 하나로 뭉친 한인들
2019년 말부터 시작된 코로나로 인해 태국은 2020년 3월부터 전면적인 국가봉쇄를 단행했다. 태국에 제한없이 입국하게 된 것은 2022년 7월 1일부터로 무려 2년 3개월이 걸렸다.
장기간의 코로나는 재태 한인사회에도 고통과 절망을 안겨주었다. 이동제한과 영업제한에 따라 관광업과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한인들이 폐업하거나 귀국행렬에 올라야 했다.
태국은 코로나가 확산되자 2020년 3월부터 국가봉쇄에 들어갔지만 코로나의 유일한 해결책인 백신은 1년 뒤인 2021년 2월 28일에야 첫 접종을 시작했다. 실질적으로 내국인 우선 백신접종 방침에 따라 재태 한인들은 곳곳마다 기약없는 유료예약을 하며 감염에 그대로 노출됐다.
위기의 시기에 한인들은 한데 뭉쳤다.
홍지희 재태 한인회 부회장을 중심으로 한인회, 코윈, 한-태 상공회의소, 월드옥타 방콕지회 등이 협력해 한인 3천7백여명이 태국내 타국보다 가장 먼저 태국정부로부터 무료백신 접종을 받은 것이었다. 방콕 뿐만 아니라 치앙마이, 파타야, 촌부리 지역 취약 한인들의 백신접종이 가장 먼저 성사됐다.
코웨이 등 한국기업에서도 병원에 필요한 공기청정기와 방역 물품 등을 기증하고 협력해 이를 계기로 재태 한인회와 한국대사관은 주요 태국 종합 병원들과 MOU를 맺고 할인 혜택과 특별 의료서비스를 시작할 길이 마련됐다.
코로나 기간 중 넷플릭스 등 새롭게 등장한 OTT 플랫폼을 통해 K-컨텐츠가 글로벌 인기를 차지하면서 한국인들은 태국에서 또다른 기회를 맞을 조짐이다.
전세계를 휩쓰는 K-POP 그룹 방탄소년단(BTS), ‘오징어 게임’ ‘미나리’ 등에 이어 태국에서는 K-컨텐츠가 인기순위를 휩쓸고 있다.
한류가 가장 뜨거웠고, 식지 않은 태국에 또다른 질서와 변화가 예고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맨주먹으로 태국을 개척해 온 재태 한인세대들이 70년간 이어오며 심어놓은 강인한 DNA는 재태 한인들이 코로나의 강을 훌쩍 뛰어넘어 또다른 기회의 100년을 향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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