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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국 한인 70년사(3): 제 1부 태국 한인 진출사
 
  태국 한인 70년사(3): 제 1부 태국 한인 진출사  
     
   
 

‘태국 한인 70년사-100년을 향한 전진’이 발간되었다. 태국에 한국인들이 어떻게 정착하고 살아왔으며 발전해 왔는가를 다루고 있다. 또 태국에 진출한 공기관과 각 기업, 언론, 종교단체, 한태교류의 역사, 태국내 주요한 한국인, 태국거주 한국인들이 태국에 대해 느끼는 설문조사, 태국의 각종 상식과 팁 등이 포함되어 있다. 발간된 책을 중심으로 일부 발췌해 소개한다. 통권은 재태국 한인회에 문의.

[3장}

태국 한인 도약 시대(1980-2000년)

▶1980년대 태국 한인 진출사

*방콕 모습

*미국에서 열린 GS재무장관들의 플라자협정

1980년 이후 태국의 한인사회는 양적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관광산업 및 투자진출 등이 지속적으로 활발해졌기 때문이었다.

1986년 대한민국 외교부 재외동포 현황자료에 따르면 태국 교민수는 449명(남 288명, 여 161명)이었다. 10년 뒤인 1997년에는 총 7901명으로 15배 이상 증가했다. 태국 진출 사유는 복합-다양화해졌다.

*중동건설붐에 따라 태국 한인도 증가했다.

1980년대 이후 교민사회가 발전을 이룬 것에 대해선 1985년 ‘플라자 합의’ 때문이라고 보는 의견들이 많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재무장관들의 합의인 플라자 합의는 일본 엔화가치의 폭등을 불러왔고 국제적으로는 3저 현상을 낳았다.

한국기업의 수익성이 좋아졌지만 동시에 한국에서 생산비용이 상승하기 시작했다.(박번순 삼성경제연구소, 한국의 대태국 추자 현황과 특성 중) 1987년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억눌렸던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수출형 노동집약적 업종인 신발, 완구, 섬유 등의 국내 생산비용이 상승했고 이들 기업들이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상당수의 기업은 인건비가 저렴한 인도네시아를 택했지만 다수의 기업은 태국을 선택했다. 한국기업들의 대 태국 투자는 섬유, 신발 등 뿐만이 아니라 전자 및 부품 등 보다 기술집약적인 투자도 있었다.

한국에서 식자재 유통업을 하다 1980년대 태국에 진출한 이응선(대한노인회 태국지회장)의 경우 처럼 태국을 중심으로 소련, 한국 등에 한약원자재를 유통하는 3각 무역에 종사하는 한인도 등장했다.

1970년 중후반 시작된 중동진출 붐도 태국 한인들의 증가로 이어졌다. 태국은 중동과 한국의 경유지였으며, 태국을 베이스로 중동에 태국 인력을 공급하는 한인들도 다수 등장했다. 중동에서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에 태국을 들러 여행하거나 쇼핑을 하기도 했다. 사우디 아라비아 등을 거쳐 태국에 정착하는 사례도 있었다.

방콕한국국제학교 건립추진위원과 재태 한인회 부회장 등을 지낸 이형배(재향군인회 태국지회장)는 1990년도 태국에 진출했다. 섬유사업 소싱에이전트를 하다 태국으로 진출한 케이스다. 한국의 디지털화와 민주화 노동운동의 영향으로 한국에서 섬유산업이 어려워진 것이 역시 해외진출의 계기가 됐다.

1990년 태국 진출후에는 섬유관련업계 종사자 모임인 ‘한올회’를 만들어 20-30명이 140회 이상의 골프모임을 이어나갈 정도로 활성화되었다고 기억한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남한이냐 북한이냐를 물어볼 정도로 1990년대 초에도 태국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인식은 크지 않았다. 아내가 토요학교 교감을 한 적도 있었다. 이 덕분에 초등학생 아이들이 한국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이형배는 태국 투자가 활성화된 시기에도 건설업, 롯데리아, 섬유공장 등은 태국진출이 쉽지 않았는데 이는 태국 상류층과 거래를 트지 쉽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장기사용권을 뜻하는 태국 임대제도 등에 대한 무지도 걸림돌이 됐다고 지적했다. 당시 태국 상황을 깊이 모르는 한국인과 기업들이 많았다는 의미다.

▶태국의 경제성장과 한국기업의 태국진출

태국에 대한 외국 투자가 홍수를 이룬 것은 1988년 무렵이다. 이 시기는 태국의 공업화와 산업화가 가장 활발한 시기로 태국 경제는 1987년-1990년 사이에는 연평균 두자릿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한국 기업들은 미국 등 선진국 시장에 우회수출용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태국에 진출하기도 했다. 중-저가 전자제품을 생산하던 기업도 많았다.

스피커 업체인 삼미 사운드가 1987년, 신발 업체인 화승산업과 무선전화기 회사인 맥슨전자 등도 1988년에 태국에 진출했다. 태국 한국 기업체 진출이 크게 늘면서 교민수도 비례하여 증가하는 것은 당연했다.

전용창(25, 32대 한인회장)은 1987년 로케트전기의 주재원으로 발령나 태국에 온 케이스였다. 30대 초반이었고 직책은 과장이었는데 구매, 총무, 노무, 현장관리 등을 아우르며 22명의 기술자들과 함께 태국에 도착했다. 다른 교민들처럼 언어소통이 애로사항이었다.

전용창은 주재원 3년 기간이 끝나 한국으로 돌아가게 됐는데 삼성전자, 맥슨전자, 모나미 등 1990년대 초 많은 기업들이 태국으로 활발히 진출하기 시작하자 인쇄업이 사업성있는 아이템이라는 생각으로 태국에 본격 진출했다.

황경선은 한국외국어대 태국어과 석사과정을 마치고1985년 시나카린위롯 대학의 유학생으로 태국에 진출했다. 그는 축구를 좋아하는 태국인들이 한국이 월드컵에 처음 진출하는 것을 보면서 한국에 대한 인식이 생기기 시작한 것 같다는 의견을 폈다.

1980년 중반 공장, 회사, 상점 등은 모두 요직은 중국계가 차지했고, 태국인은 주로 경찰 등 공무원이나 농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황경선은 유학을 마치고도 태국에 남아 통역에 이어 1987년부터는 여행사업, 식당업 등에 종사했는데 한국에 돌아가도 전임강사 자리를 맡기 어려운 대학의 현실이 태국에 남은 그 주된 이유였다.

2001년 한태관광진흥협회를 공식 등록하며 노동허가를 내주지 않는 한국가이드들의 합법화

를 위한 노력을 전개하기도 했다. 1995년 태국 관광청장이 무용단을 이끌고 한국에 가서 첫 태국관광홍보를 할 정도로 태국에서 한국은 중요시장으로 부각했다고 말했다. 여행자유화가 시작된 1989년 이후에는 차량이 부족할 정도로 여행업이 번성했다고도 기억했다.

30대 한인회장을 지낸 임부순은 역시 한인회장을 지낸 아버지 임완근(제 16대, 1991-1992)년의 권유로 태국에 왔다가 미국 유학 중 다시태국에 오게됐다. 여행자유화로 관광객이 넘치자 방콧 펫부리에 500석 규모의 대형 단체투어 식당을 관리를 맡았다.

“미국에서 파트타임으로 하루 25달러 정도를 벌었는데 여행붐으로 가이드들은 한달에 몇만달러를 벌기도 했다. 가이드들 중에 태국어를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큰 버스가 10여대 이상 늘 식당 앞에 대기했고 하루 1천명 정도가 식당을 찾았다.”

여행자유화 이전 태국은 주로 중동 노무자들이 들리는 경유지였으나 교민중 20-30대의 연령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여행자유화로 관광가이드들이 유입되며 태국 한인사회가 젊어지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1990년대 태국 한인 진출사

세계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 방콕지회장을 역임한 윤두섭은 1990년대 초반에 태국에 진출했다. 1992년 맥슨전자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그는 태국에 파견나왔다 정착한 케이스다.

1991년 맥슨전자가 스쿰윗 103에서 일본공장이 많은 아유타야로 이전했고, 한국직원은 27명에 달했다. “당시 한국기업이 많이 진출하던 시기기는 했지만 한국인에 대한 존재감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마사지를 받으러 가도 일본인이나 싱가포르인이냐고 먼저 물어봤다. 지금 같은 스쿰윗 한인상가도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항구 쪽에 부산식당이 하나 있었고, 나중에 스쿰윗에 서울집이라는 한식당이 생겼던 기억이 난다.”

윤두섭은 1996년 Noxan이란 회사를 창사, 멀티비전 사업을 시작했다. 가라오케 등에 프로젝트 대신 TV여러대를 설치하는 한국식 스타일을 도입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고 한다. 태국 시장조사를 제대로 안했기 때문이었다. 태국인들이 어두운 것을 선호해 밝은 모니터가 안먹혀 든 것이다.”

태국 진출시 태국인의 문화, 정서 등의 연구와 조사가 필요함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윤두섭은 태국 지상파 채널7의 외주제작사와 TV 협찬및 광고 등을 통해 태국인 아내를 만나 결혼한 뒤 반도체 구입및 판매회사를 거쳐 의료기기 수입 등 한국의 첨단기술 등을 태국에 도입하는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1980년대 말에는 LG 전자와 삼성전자 등 대기업이 태국에 대한 투자를 시작했다. LG 전자는 1988년 9월 Thai BMC와 합작해 처음 태국에 투자했는데 선진국에 수출하기 위한 TV를 생산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삼성전자도 LG에 이어 태국에 1989년 합작법인을 설립했다. 역시 선진국 수출용의 컬러 TV를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태국에서 생산된 제품은 대부분 OEM 방식으로 미국이나 유럽으로 수출됐다. (박번순)

LG와 삼성의 투자는 부품업체들의 투자도 촉진시켰다. 일본 업체들이 이미 자리잡고 있던 아세안지역에서 부품을 조달받기 위해서는 국내에서 협력관계에 있던 중소업체들을 동반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전반까지 태국에 1차 진출했던 노동집약적 투자는 90년대 중반 이후로는 베트남과 필리핀으로 옮겨갔다. 그곳의 인건비가 훨씬 더 저렴했기 때문이었다.

한인이 늘고 경제분야 확대가 지속되면서 한국 언론들도 태국에 주목했다. 1981년 7월 연합뉴스는 태국 방콕 특파원을 신설했다. 제1대 특파원 전종만을 시작으로 2022년 현재까지 41년간 총 14명의 특파원이 파견되어 태국을 포함 미얀마,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의 소식을 한국에 전하고 있다.

9년 뒤인 1990년 2월에는 KBS 방콕 지국이 개설돼 현재에 이르기까지 총 10명의 특파원을 파견하고 있다. 태국은 물론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와 호주 뉴질랜드 등 오세아니아주까지 취재하고 있지만 메인은 태국으로 쿠데타 등 사회문제, 쓰나미 등 자연재해를 비롯해 한류 등 한국 경제나 문화 관련 보도도 국내에 생생이 전달되고 있다. 1982년에는 태국인의 한국관광유치를 위해 한국관광공사 태국지사가 개소됐다.

제24대 한인회장(2005-2006)을 지낸 김장열은 1980년대 중반 이후 태국 한인사회의 상황에 대해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 사이에 태국 한인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일본기업들이 태국에 물밀듯이 태국에 생산기지를 구축하는 시기이기도 했는데 한인업체들도 태국에 대규모 생산기자를 만들고 7-8년 동안 집중적인 투자를 했다”고 말했다.

태국 진출 계기에 대해선 “당시 한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영업하던 해운 용선업체에서 5년동안 용선 전문가로 일을 하던 중에 해외로 진출하고자 했던 꿈을 펼칠수 있는 최적의 나라가 어딘가 찿던중에 태국이 가장 매력적으로 보였다”고 말했다.

한태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낸 이만재는 대우종합상사 근무시절 태국을 포함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에서 18년 동안 주재원을 지내다 2000년 이후 태국 법인장을 지냈다.

▶관광사업 종사 재태 한인의 증가

관광사업을 하는 재태 한인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1983년 한국에서 관광목적의 여권 발급을 처음으로 시행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만 50세 이상으로 1년 이상 200만원 이상의 관광 예치금이 있어야 가능했지만 해외 관광사업의 발단이 됐다. 

*1987년에 이은 1989년 해외여행 완전 자유화는 재태 한인의 급격한 증가를 불러왔다.

1989년 1월 1일 부터는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가 실시됐다. 시간적으로도 가깝고, 겨울이 없는 태국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이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1990년 태국을 찾은 한국인 관광객은 40만명이었으며 2000년엔 50만명으로 증가했다. 코로나 이전인 2019년엔 190여만 명 육박했다.

5-6개에 불과했던 태국내 한인여행사는 관광객의 수와 비례해 증가했으며 2007년 중반까지 500여까지 우후죽순 설립됐다. 당시 4천-5천여 명의 한국인들이 방콕은 물론 푸껫, 치앙마이 등에서 관광업에 종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관광가이드는 태국이 외국인에게는 불허하는 노동직군이라 늘 신변의 불안정성에 놓여있었으며 공식 숫자도 파악되지는 않았다.

재태국 한인회자료에 따르면, 갑자기 봇물처럼 들어오는 한국인 관광객의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워 당시에는 누구라도 태국어를 조금이라도 할 수 있다면 관광안내원으로 나서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관광업의 호황은 지속되지는 못했다. 1990년대 걸프전이 터지면서 중동 경유지였던 태국의 존재감이 줄어들었고, 쿠데타 발생 등으로 태국 국내정정의 불안도 영향을 미쳤다.

업체들의 과당경쟁으로 제살 깎아먹기가 시작돼 원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요금으로 관광객을 받아 바가지 옵션으로 손실분을 채우는 변칙영업의 서막도 열렸다. (재태국 한인회 자료중)

인터넷의 발달에 따른 여행정보의 확산으로 자유여행이란 새로운 패턴의 여행시스템이 시작됐지만 시장장악을 위한 일부 온라인 여행사들의 과다경쟁은 여전히 계속돼 재태 관광사업은 예전같은 활기를 찾지 못하고 있다.

*방콕 스쿰윗의 한인상가

여행자유화 이후 태국에 진출한 첫세대라고 할 수 있는 강준은 “체감적으로는 1992년~1993년을 거치면서 한국 관광객이 많이 늘어난 것 같다. 88 올림픽을 거친 뒤라 태국인들도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느낌”이라고 말했다. 또 “ 관광 호황기라 수입이 좋았다. 태국어를 할 줄 모르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당시 태국에 온 관광가이드들이 비슷하게 느끼는 고충이었다”고 밝혔다.

1990년대 들어 태국 진출 한인들의 직종은 더욱 다양해 기고 사연도 많아졌다. 쿠웨이트에서 건축자재 건설업을 하던 정낙범(노인회 수석부회장)은 그해 걸프전이 터지자 쿠웨이트로 돌아가지 못하고 라오스 수력발전소 건설자재를 보내기 위해 1994년 태국에 진출한 케이스다. 그러다 1997년 IMF를 맞으며 사업실패를 겪고, 제재소, 대기업 프로젝트 TV 공급 등으로 부침을 겪은 끝에 불굴의 의지로 연간 1억달러의 쿼터를 가진 태국 시멘트 원자재딜러 등으로 자리잡았다.

1990년대 말에도 한국인과 한국에 대한 인지도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1998년 용접기, 드릴 기계공구 등 철재류 사업으로 태국에 온 이정국(재태국한인회 고문)은 “1990년대 중반 이후에도 한국건설회사들이 태국에 활발하게 진출했다.친구가 태국 큰 회사에 납품하는 거래처를 가지고 있어 태국에 오게됐지만 태국인들과의 노사관계는 쉽지 않았고 태국 공구상들의 비리로 애를 먹기도 했다. 한국인의 존재감도 그다지 높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1993년-1994년 한인회 17대 회장을 지낸 강규진은 1993년 한국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태국내 한인 청소년을 위한 학교건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태국내 한인수와 진출기업의 수를 언급하기도 했다. 당시 인터뷰에 따르면, 재태 한인수는 4천여명이었으며, 종합상사 13개, 투자업체 40여사, 건설사 7개가 태국에 진출해 있었다. 1986년 외교부 분석에 따른 태국 교민수 449명에서 7년만에 10배 가까이 증가했으며 다시 4년 뒤인 1997-1998년에는 8천여명으로 늘어나 재태 한인사회의 본격적인 도약이 이뤄진 시기임을 알 수 있다.

Thai Tip3

태국에서 행운의 숫는 9, 불운의 숫자는 6이다. 9는 ‘까오’라고 발음된다. 그런데 ‘발전하다’, ‘앞으로 나아간다’라는 태국어 발음이 ‘까우나’다. 두 단어의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9가 행운의 수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6이 불길한 수인 것은 ‘넘어지다’ ‘고꾸라지다’를 ‘혹롬’이라고 말하는데 숫자 6이 ‘혹’으로 발음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