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 한인들의 가장 큰 어려움은 언어소통이었다. 이경손의 생전 인터뷰에 따르면, 일부 한인들은 태국어뿐만 아니라 영어도 전혀 구사하지 못해 그의 태국인 아내가 지인들에게 영어와 태국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건강한 몸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한인들은 개척정신 하나로 함께 뭉쳐 다니며 닥치는 대로 일을 해 돈을 벌었고, 번 돈은 나눠 쓰기도 했다. 고무농장, 얼음공장, 과자행상 등 온갖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의 고통이 씨가 되어 태국에 한국인의 뿌리를 내리게 했다.
초창기 한인들은 1964년 ‘야자수회’를 조직했다. 이경손이 초대 회장이 됐다. 오늘날 재태 한인회의 출발이었다. 부회장은 유엔기구에서 일하고 있던 김석건, 감사는 해운공사 태국 지사장이었던 진기복이 맡았다.
해방 후 태국 한인사는 두차례의 전쟁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이다.
6.25 전쟁 후 국가 건설과정에서 해외진출 및 해외이주법 제정이 이뤄지게 됐다. 태국 한인사회의 인적 구성이 보다 다양화해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종전까진 2차대전과 관련된 한인들이 태국 한인사회를 구성했다면 6.25 전쟁 후에는 선교사, 유학생, 유엔기구, 건설사, 여행, 호텔업 등의 종사자들이 태국으로의 진출을 시작했다.
▶태국의 한국전쟁 참전과 1958년 한태수교
6.25 전쟁에 태국이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것은 양국 관계가 우호를 넘어 혈명관계로 진전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태국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공식출범한 1년 뒤인 1949년 10월 한국을 정식 승인했다.
이후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발발하자 16개 유엔 회원국으로 구성된 유엔군의 일원으로 1950년 11월부터 참전했다. 태국군은 1972년 6월 철수 전까지 연인원 1만315명이 한국에 주둔했다. 6.25 전쟁을 통해 맺어진 혈맹관계는 1958년 10월 공식 외교관계합의로 이어졌고, 1960년 2월 상주 대사관 설치에 합의해 그해 3월 첫 주태 한국대사관이 설치됐다. 이듬해인 1961년 7월에는 주한 태국대사관이 설치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외국어대 태국어과 교수를 지낸 최창성은 6.25 전쟁과 관련이 있는 대표적 인물이다. 6.25 전쟁 당시 초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부산으로 피난왔는데, 태국군 장교가 입양한 것이었다. 중-고교와 교원대학교를 졸업한 최창성은 주태 한국대사관 무관실에 근무하며 교민자녀를 위한 한국어를 강의했다. 29세까지 태국에서 생활한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태국어 교수가 되었다.
1966년부터 태국어 교수로 재직한 그는 태국어과 기초교과 편찬, 한태 및 태한사전 집필, 태국어과 연수프로그램 개설 및 운영, 태국학회 창설, 정상회담 통역, 태국 대학내 한국어과 설립지원, 태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재편찬 등 한-태국어 교류와 발전에 수많은 업적을 쌓았다. 태국어 전공자들은 그를 한국 태국학계의 태두요, 역사로 기억한다. (박경은 교수)
선교사들의 태국 진출도 시작됐다. 태국 최초의 한국인 선교사는 최찬영이다. 6.25 전쟁 3년 뒤인 1956년 6월 태국에 왔다. 태국 기독교 총회가 마련해준 방콕의 중국인 교회 3층 옥탑방 단칸 방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최찬영은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1962년 태국과 라오스 성서 공회 총무로 취임하기도 했다.
김순일은 1956년 11월 선교사로 파송되어 태국 북부 치앙라이의 제2노회 순회목사로 정글 속의 마을을 찾아 전도했다. 1971년에는 방콕 한인연합교회를 설립했고 후임으로 신홍식 선교사를 초청해 담임목사 사역을 하게 하고 미국 폴러 신학대학원에서 유학하였다. (김용섭 목사)
▶1960년대 태국 한인 진출사
재태 한인회 11대 회장을 역임한 김석건은 1960년대 태국에 온 한인이다. 태국 유엔기구의 구인소식을 접하자 서울대 재학시절 전공한 농업경제에 대한 실무를 쌓아서 한국경제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다. 1964년 4월에 태국에 들어온 뒤 30여년 동안 태국의 유엔기구에서 일했다. 당시 한국인으로서는 유엔기구 최장수 근무자이다. 국제무대에서 오랫동안 활약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 외국인 선교사 집에서 영으로 성경공부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태국 교민사회 2세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김석건은 최창성과 함께 주태 한국대사관에 ‘교민학교’ 간판을 걸고 토요학교를 열었다. 한글을 아는 교민 자녀에게는 국사와 국어, 산수를, 한국어를 모르는 1세대 자녀들에게는 한국어를 가리켰다. 한국과 한국인의 정체성을 심은 진정한 재태 한국인 원로들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이 뿌린 한글과 한국교육의 씨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인 2세들의 정체성 형성에 바탕이 되고 있다.
김석건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태국에는 우리 2세들을 교육시킬 학교가 없었다. 임시변통으로 대사관의 차고 안에 칠판을 걸고 한글교육을 시작했다. 1966년 3월에 박정희 전 대통령께서 태국을 방문했다. 대사관 브리핑 뒤 학교이야기가 나와 한글교육 학교현황에 대해 보고했다. 그랬더니 깊이 감동하며 600달러를 쥐어 주었다. 우리가 ‘십시일반’하여 세운 방콕한국국제학교는 우리 교민들의 소망이 모여서 이뤄진 것이었다.”
주태 한국대사관 참사관 출신인 지백산도 1960년대 태국사회를 구성한 인물이다. 1960년 공직에서 나와 홍콩과 방콕을 오가며 곡물중계상을 했다. 관광호텔 사업 첫 진출 한국인으로는 이종혁이 언급된다. 1967년 방콕에 왔는데 둘째 형이 태국 무관으로 재직 중이었다. 이종혁은 차를 임대하여 여행업을 시작했는데 1968년엔 라자호텔에서 기념품점도 운영했다. 당시 베트남 참전군인들이 주말을 이용해 태국에 왔고, 관광업이 잘 되었다. 중동 건설붐이 일고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가 진출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방콕에서 항공기를 갈아타야 했기 때문에 이종혁의 기념품점도 번성했다. 1978-1988년까지 맨하탄호텔을 장기 임대해 사업을 확장했다.
1960년대에는 현대건설이 처음으로 해외에 진출한 시기이기도 했다. 현대건설은 1966년 태국 남부 빳따니-나라티왓 구간 105km를 완성했다. 이 도로는 현대건설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고, 현재까지도 가장 잘 만든 도로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 현장의 경리담당이 이명박 전 대통령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폭도들이 들이닥쳤을 때 이명박은 금고통을 붙들고 현대의 자산을 지켜냈다. 1960년대 중반 정주영, 정세영, 정인영 등 현대 임원들이 방콕을 왕래했고, 정세영은 현대의 초대 방콕 지점장을 맡기도 했다. 현대건설은 이후에도 태국 서북부의 딱-턴 구간의 도로공사를 맡기도 했다. 태국에서의 건설공사 경험이 밑바탕이 돼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베트남 캄란만 준설공사, 알래스카 협곡 교량공사 등의 해외수주와 함께 중동진출의 토대를 마련했다. (김영애 교수)
1962년 11월엔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가 방콕에서 가장 교통이 편리하고 번화한 지역이었던 Rama 1 가에 개관했다. 방콕무역관의 개관은 뉴욕, LA, 홍콩에 이은 네번째로 당시 한국에 대한 태국 시장의 중요성을 말해주기도 한다.
방콕무역관 개관식에는 코트라 사장 및 주태국한국대사, 태국 교민들이 참석하였고, 태국측에서는 재무장관, 무역위원회위원장, 상의회장 및 각국 외교관, 다수의 기업인이 참석했다. 개관 초기였던 1960년대에는 주로 태국 바이어에게 우리나라 제품을 소개하고 거래를 알선하는 업무와 함께 태국시장에서 유망한 품목을 조사해 국내 업계에 전달하는 업무였다.
미약하긴 했지만 문화사업도 1960년대 일부 진출했다. 당시 태국은 일본과 중국문화의 영향력이 큰 상황이었다. 이종화는 한국에서 히트했던 영화 ‘성춘향’을 태국에 수입해 상영했다.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깡완 촌라꾼’이란 태국이름까지 가진 강철구는 태국에 진출한 한국 연예인 1호로 기록된다. 색소폰 연주로 유명했고, 푸미폰 전 국왕의 음악고문을 맡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1988년 서울올림픽 주제가인 ‘손에 손잡고’를 부른 혼성 4인조 그룹 코리아나의 이용규와 이승규는 자녀들과 함께 1968년부터 4년여간 ‘식스 코윈스’라는 이름으로 방콕을 중심으로 한 동남아에서 활동했다.
김영애 교수는 일부 한국연예인의 활동이 태국을 중심으로 이뤄진 것은 당시 베트남 전쟁과 관계가 있다며 스타 더스트 클럽밴드 마스터와 유원타이 건설회사 전무를 지낸 박춘규와 인터뷰를 통해 밝히고 있다.
“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63년 동남아 순회공연을 하면서였다. 태국을 시작으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를 거쳐 다시 태국으로 돌아왔다. 태국 푸미폰 국왕은 음악을 전공하신 분으로 직접 작곡한 곡만해도 600곡이 넘었다. (중략) 국민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왕께서 그렇게 음악에 조예가 깊으니 국민들도 음악을 무척 좋아하는 편이었다. 악단의 단장이나 마스터가 되면 주위 사람들로부터도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 음악가에게 깊은 존경을 바치는 태국의 분위기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방콕내 한국 음식점도 1960년대들어 첫 등장했다. 한인회 1대 회장을 지낸 이경손이 교민 6명이 출자한 한국요리점 ‘코리아 하우스’를 개업한 것이었다. 교민 사교장이며 클럽이기도 했다.
한국-태국 ‘하늘길’을 처음으로 연 것은 타이항공이었다. 타이항공은 1968년 4월 1일 방콕과 서울을 오가는 역사적인 첫 비행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 6개월 뒤인 1969년 10월에는 대한민국 국적의 대한항공이 방콕 상공을 날았다.
▶1970년대 태국 한인 진출사
1970년 대 들어 태국 한인진출은 베트남 전쟁과 상관성이 높다. 태국은 파월 장병들의 휴가지 이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은 1946-1954년, 1960-1975년 총 23년간 일어났는데 한국군이 전쟁에 첫 참여한 것은 1964년 9월 이후로 ‘2차 베트남 전쟁’ 이었다. 한국군은 1966년 추가 파병을 했으며, 1971년 12월부터 1973년 3월까지 단계적으로 철수하기 전까지 총 8년여간 참전했다.
원로 교민 김석건은 “당시 한국군의 총사령관은 채명신 장군이었다. 채사령관은 파월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방콕의 에라완 호텔에서 위문공연을 가진 적도 있다”고 밝혔다.
위문공연에는 패티김을 비롯한 한국의 정상급 연예인들이 많이 출연했다. 베트남 전쟁과 함께 많은 한국인이 태국에 왔고, 월남 패망 후에도 상당수가 진출했으나 체류허가가 어려워 타국으로 떠나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 후 한국 건설회사, 토건회사, 운송회사 등이 연이어 태국에 진출했고 이는 이후 태국 진출의 교두보가 됐다. 베트남에 진출했던 한국인들이 본격적으로 태국으로 온 것은 베트남 경기가 침체되기 시작한 뒤 부터다. 이들은 태국을 징검다리로 삼아 다시 중동과 호주로 진출하기도 했다.
한인회장을 지낸 강규진은 1970년대 한인사회를 구성한 주요 사람 중의 한 명이다. 그는 1971년 베트남에서 태국으로 왔다. 한국에서 미국계 선박회사에 근무하다 베트남 캄란만의 미군부대 군수물자 하청회사인 빈넬의 인사와 경리파트에서 일했다. 태국을 거쳐 중동에서 식품사업을 하기도 했고, 다시 태국으로 돌아와서는 일본 관광회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강규진은 태국 한인사를 이렇게 말했다. “제1세대에 이어 태국에 온 한국인은 베트남 전쟁 후 베트남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자 중동에 건설붐이 일었다. 베트남에 주재하던 많은 한국인들은 일단 태국으로 건너온 뒤 중동이나 미국으로 갔고 일부는 그대로 태국에 정착하기도 했다.”
1969년 베트남으로 진출, PX 노무자로 일하던 이철희도 1971에는 태국에 진출 터를 잡았다. 베트남 전쟁으로 태국에 미공군이 5만명 가령 있었는데 베트남에서의 PX 사업을 이어가다 중동 건설붐이 시작되자 태국에 베이스를 두고 태국인력을 쿠웨이트에 이어 현대건설에 공급했다. 중동에서 제 3국 노동자를 고용하게 한 것은 이철희가 처음이었으며 사업은 크게 성공했다. 이철희는 초창기 실롬에 대형 한식당 고려정을 인수하는 등 다방면의 사업을 전개해 초창기 성공한 재태 한인 첫주자로 불리기도 했다. 여러해에 걸쳐 재태 한인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제 16대 한인회장을 지낸 임완근(1991-1992)도 베트남을 거쳐 태국에 진출한 케이스다.
베트남 전쟁후 베트남에 진출한 임완근은 1972년 태국으로 와 캐슈넛오일 채취 공장을 설립해 한국으로 수출했다. 이후 중동건설 붐이 일자 사우디에 태국 인력을 보내는 사업을 전개했다.
공무원 출신의 김형곤도 베트남을 거쳐 태국에 온 케이스다. 베트남 대훈산업 건설 지사에서 근무하던 그는 1975년 4월 29일 월남 패망 하루 전 태국으로 왔다가 그해 6월에 이란으로 건너가서 5년5개월을 거주했다. 1979년 팔레비 왕조가 붕괴하자 요르단으로 이주해 2년간 거주하며 사업을 하다 1983년 태국으로 돌아와 ‘맨파워’란 사업을 시작했다. 그의 대상은 이라크, 리비아 등도 포함됐다.
김형곤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당시 태국 노동자 소개 커미션이 아주 좋았다. 1인 700달러를 받았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3천달러까지 받기도 했다. 나는 사정을 몰라 적게 받았지만 그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신용을 얻었다.”(김홍구 교수 인터뷰) 김형곤은 한태상공회의소 회장, 제27대 한인회장(2011-2012), 노인회장, 방콕한국국제학교 운영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2022년 도쿄 올림픽에서 마침내 금메달을 수확한 태국 태권도의 ‘오리진’도 베트남 전쟁과 관련이 높다. 1966년 태국에 주둔한 미국부대를 상대로 태권도 시범을 보였던 것이 계기가 되어 6명의 태권도 사범들이 태국에 들어왔다. 김승곤, 박영훈, 허문선, 한상철, 손영래 사범 등이다. 베트남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74년 미군들이 본국으로 귀환하자 한국인 사범들이 그 때 이후로는 태국인들에게 태권도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태국 태권도에 빠질 수 없는 인물은 송기영이다. 송기영 사범은 1972년부터 유명 대학교 체육교수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과 함께 태권도 교육을 시켰다. 태권도 사범 30여 명과 태국 전역을 돌며 시범활동도 했다. 사단법인 태권도 협회도 만들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일자리를 찾아보려고 서울 갈 결심을 했다. 여름에는 아이스크림, 겨울에는 땔감 장사도 했다. 그러다 외국에 나가볼까 하는 생각으로 태권도를 하게 됐다. 군생활 마치고 태권도 가르치러 캐나다로 가보려 했지만 비자문제로 여의치 않아 태국에 먼저 와 있던 분의 권유로 오게 됐다. 태국에 와서 처음 2년은 괜찮았지만 가르치던 미군들이 떠나면서 경제적 어려움이 컸다. 로얄 스포츠클럽에 나갔지만 입에 풀칠이나 할 정도였다. 텃세도 커 힘들었다. 키가 2미터나 되는 미군 해병대는 태권도를 한다며 다니다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The BRIDGES 인터뷰, 2013)
송기영은 한인회장으로 봉사하기도 했고, 송기영 컵 전국 태권도 대회를 만들어 태권도 꿈나무들을 찾아냈다. 한인회장(2003-2004)으로 봉사하기도 한 송기영은 태권도를 통해 인성교육을 함께 시켰다. 태권도를 ‘화랑 5계’에 접목시킨 것이다.
1970년 해외투자법인 1호라는 기록을 세우며 파이롯(Pilot)가 태국에 처음 진출했다. 이미 1950년대 일본에 진출한 파이롯을 한국이 인수하는 형태였고, 1974년에는 박선호가 26세의 나이로 법인장으로 부임했다. 한국 파이롯은 1979년 방콕 실롬에 첫 사옥을 짓고 한국기업으로 사세를 확장해 갔다. 직원 100여명으로 일본 한국 유럽 대만 등과 무역을 전개하고 잉크, 사인펜, 매직, 라이터 등을 직접제조하기도 했다. 파이롯은 당시 태국 한인회에 20만밧을 기부, 오늘의 재태 한인회의 건물마련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10년 넘게 파이롯의 법인장을 지낸 박선호는 “1982년에 방콕 아시안 게임이 있었고, 1986년에는 한국에서 아시안 게임이 개최됐다. 태국인이 한국인을 인식하게 된 모멘트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박선호는 “1970-1980년대 주요 경쟁상대는 대만이었다. 한국 제품은 대만제보다 품질이 20% 정도 좋았고, 가격은 그 만큼 비쌌지만 한국제품은 싼 것으로 인식돼 정말 어려웠다”고 밝혔다. 박선호는 1985년 이후 개인무역, 식당운영 등을 하며 태국에 정착했다.
태국인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직원가운데 벤츠 승용차를 끌고 출근하는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 오토바이나 차가 있었던 것 같다. 자동차가 참 많았다. 한국에는 흑백으로 나오는 KBS와 MBC TV 밖에는 없었지만 1974년 태국에는 5개 TV 방송이 있었고, 모두 컬러였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태국인 직원들은 책임성과 창의력은 없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태국인들은 친절하고 예의 발랐다. 어떤 지시를 내리고 확인하지 않으면 틀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해가 안되면 오해로 이어졌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자유스러움이 좋았고, 그런 로컬 컨디션을 받아들일 수 있어 현재까지 태국에 남아 살고 있다.”
그는 1970년대 재태 한인사회는 원로교민, 대사관, 대한항공, 코트라 및 베트남, 중동 이주인 들등 100여명 정도 규모의 가족적 분위기였으며 매월 정기골프, 경조사 및 송별회 등의 모임을 가졌다고 말했다. 그는 1976년부터 1979년까지 한인회 재무이사 및 골프간사를 역임했는데 기관장 이임시에는 한인회(회장 박재기) 주관으로 고려정 및 그레트샹하이등에서 전교민들이 참석해 이별의 아쉬움을 달랬고 이때 귀국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오지에 발령받아)울면서 왔다가(정들어 떠나기싫어)울면서 떠난다"는 소감을 피력해 하나의 귀국소감 대명사가 됐다고 기억했다.
Thai Tip
태국의 인구증가는 2021년 54만4570명에 머물렀다. 가임 여성 1명이 낳는 출산률은 1.3명으로 세계 평균 2.5명을 밑돌고 있다. 2040년이 되면 60세 이상은 32%에 이르고 외국인을 제외한 현인구 6천600만명은 4천만명으로 감소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