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한인 70년사-100년을 향한 전진’이 발간되었다. 태국에 한국인들이 어떻게 정착하고 살아왔으며 발전해 왔는가를 다루고 있다. 또 태국에 진출한 공기관과 각 기업, 언론, 종교단체, 한태교류의 역사, 태국내 주요한 한국인, 태국거주 한국인들이 태국에 대해 느끼는 설문조사, 태국의 각종 상식과 팁 등이 포함되어 있다. 발간된 책을 중심으로 일부 발췌해 소개한다. 통권은 재태국 한인회에 문의.
한국 태국의 관계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학자들은 14세말 고려시대부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태국에 한인들의 거주가 처음 확인된 것은 1990년 초부터다. 양국의 공식 외교관계 수립은 1958년으로 2023년은 65주년이 된다. 재태 한인사는 연구자들에 따라 상이하지만 대체로 해방 전과 해방 후 및 6.25 전쟁 이후의 시대로 구분하고 1989년 한국의 여행자유화와 건설업 활성화에 따른 본격 진출시대로 분류하는데 큰 이견이 없다. 해방 후로만 치면 2022년은 태국 한인사 77주년이 된다.
[1장]
오리진, 한-태교류의 시작
▶한태 교류의 기원
2000년 초반 태국에 한류가 전해지며 태국 한인사는 또다른 양상을 맞게 된다. 2010년 이후에는 한류가 만개하며 제조업은 물론 관광, 서비스, 패션, 교육, 유통, 문화 컨텐츠 등 전방위의 한국문화가 유입되며 새로운 한인 역사가 쓰여지고 있다. 2020년 초부터 시작돼 전세계를 휩쓴 코로나 이후 태국 한인사는 또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
한태 관계의 오리진과 함께 대한민국의 국격이 크게 상승한 2022년까지 축적된 태국 한인의 삶은 이제 100년을 향한 새로운 전진에 나섰다.
한국과 태국 간 접촉이 드러난 첫 문헌은 1451년 작성된 고려왕조의 연대기 ‘고려사’다. 공양왕(재위 1389-1392) 3년인 1391년 음력 7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섬라곡 왕이 나이 공 등을 사신으로 삼아 배를 감독케 하고 토산물을 싣어 고려국왕에게 바치도록 명했습니다.’(중략)
조흥국 교수는 ‘14세기 말 한국과 태국의 교류’라는 논문에서 섬라곡은 중국어로 ‘셴뤄후’로 태국의 옛명칭인 시암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며 중국에선 태국의 아유타야 왕조를 지칭하는 국호로도 사용되었다고 주장했다.
‘섬라곡’은 당시 고려정부에게는 낯선 이름은 아니었다. 고려정부는 중국에서 돌아온 사신의 보고를 통해 섬라곡이 베트남, 캄보디아 등과 함께 중국에 조공 사신을 파견하는 중국 번방의 나라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후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실록’에는 이성계(재위 1392-1398)가 조선왕조를 창건한 1393년 음력 6월 16일 장쓰다오 등 태국인 20명이 조선을 방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말 공양왕 때 태국으로 돌아간 나이 공 일행이 태국에 한국에 대해 소개했고, 동아시아의 새로운 무역시장에 대해 알게 된 태국이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흥국 교수는 나이 공의 방문때 국왕의 서신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한국과의 첫 교류 태국인은 정부 관계자가 아닌 무역업 종사자 일 수 있다는 의견도 폈다.
김홍구 교수는 고려말과 조선 초 이후 양국의 교류관계는 한동안 이어지지 않다가 왓포 사원에서 태국의 현 왕조인 랏따나꼬신 왕조(1782- 현재) 라마 3세(1824-1851) 때 한국인에 대해 기록한 첫 문헌을 찾아볼 수 있다고 밝혔다.
태국 문헌에 나타난 옛 한국인에 대한 인상은 이렇다.
‘베트남 사람과 닮은 이방인으로 머리를 묶어 올렸다. 수염이 많고 턱 아래까지 길렀다. 천진 가까운 곳에 살며 우아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 멋진 비단 바지를 입고 잉우인들이 쓰는 모자를 쓰고 있다.’
2000년 이후의 한류 열풍으로 태국 젊은이들은 꽃미남 K-POP 보이밴드 아이돌에 열광한다. 200년 전 태국 사료에 나타난 한국인의 패션이 남다른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한국인이 태국에 무슨 목적으로 들어왔는 지 상세한 기록은 남아있지않다. 당시의 인구조사에 보면 방콕 인근에 13명의 한국인이 살았으며, 중국인 중의 한 부류로 ‘찐까올리’로 표기되었다고 한다. (정환승 빠릿인센 2015)
1880년 고종 17년에는 조주 사람과 섬라 사람들로 이루어진 상선이 난파당해 충남 서천군 서면 도둔리와 마량리에 표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표류 당시 선박에 타고 있던 사람은 총 28명이었으며 이중 태국인은 18명이었다. 태국인들은 모두 배를 운항하는 선원으로 추정됐고, 중국인 중 허필제라는 사람은 태국과 중국 대륙 남북을 오가면서 운송,교역을 하던 선주였다.
결국 태국과 한국의 교류는 고려말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간헐적이고 우연한 것에 불과했다는 게 중론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 조선조가 농업을 장려하고 상공업은 억제하는 이념 때문으로 분석된다. 더욱이 한반도 연안까지 출몰하는 왜구의 위협은 해외무역 활동에 소극적인 자세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태국 아유타야 정부는 조선시장에 대한 불안정성으로 인해 교역에 관심을 잃고 더이상 한국으로 사신을 파견하거나 방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인들이 본격적으로 태국을 포함한 동남아 지역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에 들어서 부터이다.
▶해방(1945) 이전의 태국 한인들
1900년 초 고려인삼 상인들은 동남아 각지로 뻗어 나갔다. 1916년 2월 17일자 조선 총독부 관보에는 ‘인삼 판매 및 기타 행상을 목적으로 신가파(싱가포르) 지방에 도항하는 자가 점증했으나 대부분이 여권을 소지하지 않아 다시 인도, 섬라 태국, 마닐나, 인도 방면으로 가기 위해서 일본 영사관에서 여권을 내려고 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고 적시돼 있다.
이 시기는 일제 강점기다. 태국에는 어느 정도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을까?
1919년 3월 일제의 조사자료에 따르면, 태국에 있는 한인은 5명으로 모두 인삼 행상을 본업으로 했다.
정원택이라는 사람이 쓴 기록에 따르면 1917년 방콕을 방문했을때 한국인 인삼상인을 만났다고 했으며, 임시정부에서 내무차장을 지낸 이두산이란 사람도 방콕에 거주지를 두고 1930년대 까지 인삼행상을 했다고 전해진다.(김인덕 외 2008)
김영애 교수는 상해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중 그곳에 일본군이 상륙하자 상해를 탈출해 방콕으로 간 이경손(1905-1978)이 일제하 태국에 거주한 최초의 한국인이라고 추정했다. (1960-70년대 태국사회 속의 한국인)
어의의 손자인 이경손은 서울 출생으로 경신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일제하 해외 도피의 수단으로 인천해원양성소 항해과를 수료한 것으로 전해진다.
영화감독이기도 했던 그는 1926년 영화소설 ‘백의인’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는데 항일색채를 띠었다. 이로 인해 일제의 압박을 받자 1931년 상해로 망명하여 김구를 만나 임시정부에서 활동했으며, 1932년 윤봉길 의거로 쫓기는 몸이 되자 상해에서 태국으로 탈출했다는 것이다.
방콕에 온 이경손은 방콕과 말레이 국경을 전전하며 화교학교의 영어교사로 생활했다. 그러나 태국어를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이주 초기에는 태국생활이 힘들었다. 이후 반일 경향의 태국 신문사 비서였던 태국여성에게서 태국어를 배웠고, 결혼까지 하였다. 결혼 몇년 후 2차대전이 터지자 시골로 낙향했고,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자 다시 방콕으로 돌아와 기업인으로 중개무역을 했다. 1976년 방콕에서 별세한 이경손은 초대 한인회장을 지냈다.
2차 대전때 일본군에 강제 징용되어 군인이나 포로감시원 등 군속으로 1943-1944년 사이 태국에 온 한인들도 많았다. 1941년 12월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후 전장이 확대된 후였다. 1942년 이후 연합군의 반격으로 해상보급로가 위협받자 일본은 육로를 통한 보급품 공급루트를 마련했다. 밀림과 계곡을 관통하는 비밀 철도였다. 태국의 논프라독과 미얀마 탄비자야의 418km를 연결하는 철도였는데, 방콕과 깐차나부리를 연결하는 것이 최단거리였다.
*콰이강의 다리는 재태 한인사의 출발이 되었다. 사진은 영화속 장면
그러나 깐차나부리 콰이광에 다리를 놓는 것은 큰 난제였다. 일본은 철도 작업과 교량 건설 작업에 연합군 포로들을 투입했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인들은 일본 군대의 장병이나 군속으로 끌려와 연합군 포로들의 감시요원이 되기도 했다.
이우철 교수에 따르면, 당시 군속들은 1942년 6월 부산 노구치부대에서 2개월간 특별 훈련을 받았고, 2700여 명이 3천톤급 ‘광산호’를 타고 동남아 전선으로 향했는데 이중 영어를 잘하는 300여명은 콰이강의 다리공사 현장인 제4프로 수용소와 인근 수용소에 배치돼 연합군 포로들의 감시를 담당했다고 조사했다.
2015년 8월 9일 KBS 탐사보도 프로인 '시사 기획 창'-광복 70년 특집 '끌려간 소녀들 버마 전선에서 사라지다'는 기밀문서에서 해제된 태국 최고사령부의 문서보관소에서 한인여성 490여명의 명단을 확인, 태국에서의 한국인 위안부의 존재를 알리기도 했다. KBS 탐사팀은 위안부 시설이 있었던 깐차나부리를 찾아 당시의 흔적을 발견하고 주변 태국인들의 인터뷰를 통해 일제의 만행을 알렸다.
김홍구 교수는 1944년까지 동남아 지역에는 포로 감시원, 공사작업 노무 등의 일에 종사한 한인들의 수가 3만명이 넘었다고도 밝혔다.
1990년 초 소수의 인삼상인이 태국에 첫발을 내딛었지만 일제하 깐차나부리 다리공사는 한인들이 태국에 첫 집단체류하는 계기가 된 셈이었다.
김영애 교수는 이들은 일본군으로부터는 식민지 식민으로 차별과 감시를 당했고, 연합군 포로들로부터는 열악한 부상자 치료나 처우에 대한 책임과 비난을 뒤집어쓰는 등의 고통을 겪었다고 주장했다. 홍중묵(97년 사망)은 당시 제4포로 수용소에서 전담통역자로 영국군 포로와 일본 포로수용소 소장 간의 통역을 맡았는데 양자 사이에 끼어 심신의 고초가 컸다고 생전 인터뷰에서 털어 놓았다.
해방 전후의 인물 중 한인사의 상처로 기록돼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노수복이다. 한국 언론을 통해서도 잘 알려진 노수복은 21세때 빨래 터에서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로 싱가포르에 위안부로 끌려갔다. 2차 대전 말기에는 말레이시아로 옮겨졌고, 종전 직후 수용소를 탈출해 태국 남부 말레이시아의 국경인 핫야이에 정착하게 됐다. 탈출 후에는 중국계 남성과 결혼하였다.
일본 아사이신문의 마쓰이 야요리 기자는 1984년 핫야이에서 노수복을 만나 위안부 생활의 후유증으로 아이를 못낳는 노수복의 가슴아픈 사연을 전했다. (김영애 교수)
노수복의 사연이 전해지자 한국정부는 그녀의 귀국을 도와 1988년 40년 만의 고국방문이 이루어졌다. 노수복은 한국어를 거의 잊어버렸지만 어린시절 살았던 경상북도 안동군 봉산면 광덕동은 물론 아버지와 동생의 이름, 민요 ‘아리랑’과 ‘도라지’를 또렷이 기억해 냈다.
생일을 잊은 노수복은 광복일인 8월 15일을 새생일로 정했다. 친동생을 만나기도 했던 노수복은 다시 태국으로 돌아와 2011년 별세했으며 유골은 경상북도 예천군 선산에 안장되었다. 노수복은 한국을 방문한 뒤 정부가 지원하는 월 2만7천밧의 연금을 받아 생활했으며 별세 전인 2004년과 2007년에는 방콕한국국제학교 장학금을 내기도 했다.
일제하 태국에 온 한국인들은 해방 후에도 태국에 남아 자의반 타의반으로 태국인과 결혼하거나 정착해 아픈사연을 품은채 초기 태국 한인사회를 구성했다.
Thai Tip1
‘왕의 강’이라고 불리는 태국 짜오프라야 강의 길이는 372km. 강원도 태백에서 발원해 서해로 흐르는 한강의 514km 보다는 짧다. 하지만 태국 북부에서 흘러온 핑강, 난강, 용강 등을 이으면 전체길이는 1200km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