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6일 열린 국회에서 패통탄은 재적의원 과반 이상의 지지표를 얻어 예상대로 가뿐하게 태국총리에 올랐다. 총 493명의 재적국회의원 중 248표를 얻어야 하는데 319표를 얻었다. 145명의 의원은 반대표를 던졌다.
스스로 ‘진보적 자본주의자’로 칭하는 30대의 패통탄이 총리가 되면서 태국이 경제회복과 함께 민주주의에 한발짝 더 다가설지 주목된다.
자신의 고모 잉락처럼 국회의원이나 정부직을 한번도 맡은 바 없는 패통탄은 아버지의 후광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2년 6개월 전인 2022년 3월 친 탁신파인 프어타이 당의 자문을 맡으면서 시선을 받기 시작했다. 1년 뒤인 2023년 4월에는 여론조사에서 차기 총리 1순위로 급부상했다.
당내 인기 1위에도 불구하고 총선 뒤 연립정권을 이룬 후의 총리직은 세타 타위신 총리에게 양보했지만, 국가소프트파워 전략위원회 부위원장에 이어 지난해 10월에는 프어타이 당의 대표로 선출되며 고속도로로 내처 내달렸다.
정치 입문 뒤 패통탄은 ‘먹고 사는 민생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징병제 반대, 1인 1만밧(약 40만원) 무상지원 등의 정책을 지지한다. 중앙은행의 이자율이 너무 높아 중소기업에 부담이 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헌재의 의해 해산된 제1야당 전진당의 피타 전대표와는 LGBT 와 동성결혼 등에 의견을 같이해 한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피타 전대표와 전진당이 왕실모독제를 다룬 법률의 개정을 주장하다 정치무대에서 사라진 반면 패통탄은 왕실모독제의 존치와 국왕을 원수로 한 입헌군주제를 지지한다.
*세타 전 총리와 각별했던 패통탄 총리. (카오솟)
약 57만명의.팔로워가 있고 자신의 가정사 등도 종종 업로드해 직접 운영관리하는 것으로 보이는 SNS에는 왕실관련 소식도 자주 올린다. 올해 국왕 72주년 행사의 준비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패통탄 총리는 탁신 전총리의 3녀중 막내다.
7세 위의 오빠 판통태가 있고, 4세 위의 언니 핀통타가 있다. 이들 모두 다 친나왓 그룹을 이끈다.
조종사 출신으로 현재 Rende라는 부동산회사 투자담당 부사장인 사업가 피카카 숙사왓과 2019년 결혼해 1남1녀를 두었다. 막내딸은 지난해 총선 14일 전에 제왕절개로 출산했는데, 만삭의 몸으로 선거운동을 펼쳐 화제를 모았다.
태국 국립 쭐라롱꼰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고, 영국 서리(Surrey) 대학에서 국제호텔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유학 후에는 줄곧 탁신 친나왓 가문 사업에 참여했으며 21개 계열사의 총 지분이 680억 밧(2조7천억원) 이나 된다.
태국에 증여세가 따로 없으므로 어려서부터 재산을 물려 받은 결과다. 아버지가 총리에 있을때는 종종 공식석상에 모습을 보이곤 했다.
*아버지인 탁신 전총리의 귀국 전후 패통탄은 여러 경로를 통해 근황을 알리기도 했다.(페북)
아버지 탁신이 돈과 권력을 함께 갖춘 최전성기 청소년기를 지나 대학 2학년때인 2006년에는 군사구테타로 물러나는 것을 목격했다. 여기다 28세때인 2014년에는 고모 잉락 전총리마저 헌재의 탄핵결정에 이어 야밤 해외도피를 해야하는 가문의 흥망성쇄를 지켜봐야 했다.
탁신 전총리가 15년 이상 해외도피생활을 해 20대 이후에는 아버지와 지낸 시간이 거의 없다. 그 때문인지 그녀의 SNS에는 아버지와 함께 하는 손녀딸 등 가족사진들이 많다.
*대학졸업식 가족과 함께한 패통탄 총리, 왼쪽부터 큰오빠 판통대 어머니 폿자만 패통탄, 아버지 탁신, 언니 핀통타. 팔로워 47만명의 패통탄 총리 페이스북에는 음식, 가족 이야기 등도 많다.
대학시절 정치학을 전공하며 루소와 몽테스키외를 당연히 배웠을 법한 패통탄의 정치사상과 권력의지는 아마 가문의 역사와 혼재되어 형성되지 않았을까?
아버지 탁신의 트레이드마크 OTOP (한 지방 한가지 특산물 갖기 운동) 처럼 패통탄은 OFOS(한가정 한가지 소프트파워)를 주장한다.
지난 6월말 태국 첫 소프트파워포럼인 ‘Splash’ 개최를 주도했다. 행사에 대한 문제와 볼 것 없었다는 지적이 이어진 것을 의식했는지 페이스북에 직접 사과와 향후의 발전을 약속하는 글을 올렸고, 관계자들을 일일이 언급하며 감사를 표시했다.
태국에 한류가 한창인 2010년 이후 20대를 보낸 만큼 이 시기의 태국 젊은이들처럼 한국문화에 대한 긍정적 감상이 있지 않을까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