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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세월을 남기는 사진, 진보하는 카메라
내 모습이 최초로 기록된 것은 아홉 살 무렵이다.
꼬부랑 할머니 친정 가는 길에 따라 나서 산 능선 서너 개를 지났을 즈음 친척 형이 찍어준 흑백사진이다. 할머니 팔짱을 끼고 찍은 그 사진은 행여 영혼을 빼앗길 소냐 돌부처처럼 굳어 서 있다. 사진이 귀했던 그 시절의 농촌에서 장손이 아닌 둘째 이하는 돌 사진도 남겨둘 여유가 없었나 보다. 하긴 내 평생 누드 사진이 없는 게 다행이긴 하다.
지금 내 아들 녀석은 제 어미 뱃속에서 사람이 아직 덜 된 3개월 쯤의 초음파사진부터 기록되기 시작했다. 그걸 보는 당사자의 실제 기분이 어떨지 궁금하기만 하다.
사진을 왕창 찍을 기회는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친구녀석 하나가 월남전에 갔던 작은 아버지가 돈 벌어 사온 카메라를 가져 온다며 며칠 전부터 예고했던 터라 잔뜩 신경 쓰고 나갔다. 마구 누르는 셔터에 왼쪽 오른쪽 정성껏 응했다. 하지만 뭔 고장으로 단 한 장의 사진도 남기지 못했다.
방송기자를 하던 1990년대 말 30대 중반 쯤에 연예인과 유명인의 인터뷰를 위해 사진이 꼭 있어야 했다. 보통은 사진기자가 동행해 촬영해 주지만 일손이 부족하면 `똑딱이'라고 하여 자동카메라를 신청해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연예인에게 그 조그만 `똑딱이'를 들이대는 건 무례한 일(?). 얼마 뒤 망원 줌렌즈에 그립까지 달린 폼 나고 무거운 카메라를 구입했다. 하지만 인물사진을 촬영해 신문에 까지 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사진을 인화해 보면 얼굴에 그늘이 지거나 미모를 절하시키는 욕먹을 것 같은 사진이 수두룩하게 나왔다.
사진에 대한 사무치는 욕구가 조금씩 해소된 것은 디지털카메라의 보급이 한참 진행된 이후다.
사진작가를 겸하고 있는 후배기자에게 기왕이면 좋은 사진기 하나 추천해 달라고 하자 풀프레임 어쩌구 저쩌구 하며 캐논 EOS 마크2를 권하는 것이었다.
비쌌다. 1년 이상을 망설였다. 공항 면세점에서 배고픈 놈 빵 가게 처다보는 양 카메라를 보고 서 있자 옆에 있던 아내가 혀를 끌끌차며 좀생원 취급해 구매를 부추겼다.
여러 권의 책도 읽고, 렌즈도 바꿔가며 제법 많은 사진을 찍었다. 사진 실력이 느는 게 아니라 장비만 는다는 것을 안 것도 오래지 않았다. 다만 남이 찍은 좋은 사진에 감명받을 줄은 안다.
얼마전 여차여차한 결심이 들어 캐논 5D 마크4와 단렌즈 하나도 구입했다.
그 새 정신 줄 놓고 있는 사이에 카메라에 엄청난 발전이 있었다. 100D 같은 DSLR카메라는 스마트폰으로 바로 전송할 수 있는 메모리 카드가 나와 있었다. 5D 마크4의 경우 61개의 초첨, 따발총 연사기능, 터치스크린, 와이파이기능, 동영상촬영 등 기능이 무수하다. 와~우~~
행사 뒤 남이 찍은 수백장의 사진을 고르다 보면 쓸 게 하나도 없다. 한 행사에서 한번은 넥타이 차림으로 카메라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자 누군가 '그냥 직원이나 애들 한테 맡겨요'하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수평 만 잘 맞추는 정성을 보여도 사진이 달라지는데 도무지 왜 그런 작은 노력조차 안하는 걸까?.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이 흔한 세상이 됐지만 실제로는 폴더 속에서만 잠자는 사진이 많다.
찍었지만 보지 않는~~. 인화하는 곳도 찾아보기 어렵다.
아무렇게나 찍은 사진이라도 몇 개월에 한번씩은 인화를 해 내방 이곳 저곳에 붙여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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