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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태 닮은 꼴 역사의 인물 궁예 vs 딱씬
 
  한-태 닮은 꼴 역사의 인물 궁예 vs 딱씬  
     
   
 

 

한국의 궁예와 태국의 딱씬은 매우 유사한 운명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676년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한 통일신라는 9세기말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는데 궁예는 이러한 혼란을 틈타 901년 후고구려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이와 유사하게 견훤이라는 인물도 후백제(900년)를 세움으로써 통일신라는 다시 분열되고 후삼국 시대(901~936년)가 열렸다.

신라 왕족 출신이라고 알려 진 궁예의 출생과 성장과정은 비극적이다. 한 예언가는 궁예는 장차 나라에 이롭지 못할 듯하니 기르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예언을 했다. 그래서 태어나 얼마 되지 않아 왕이 그를 죽이도록 명하였는데, 젖먹이는 노비가 그를 구하던 중 손으로 눈을 잘못 찔러 한쪽 눈이 멀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궁예는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나이가 든 궁예는 난세를 평정하기 위해서 승가를 나서 3,000명이 넘는 병력을 모아 나라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초기에 궁예는 ‘병졸과 함께 고생하며, 공평무사하게 백성을 다스렸다’라고 전해진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를 사랑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궁예는 강원도, 경기도 일대를 차지하고 중부 지역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송악을 도읍으로 정하고 후고구려를 세웠다.

딱씬은 아유타야 왕조가 1767년 버마의 공격을 받아 왕조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았을 때 나타나 구국의 영웅이 되었던 인물이었다. 딱씬 역시 어린 시절 절에 들어가 승려 생활을 했으며 후일 딱(ตาก) 이라는 작은 지방도시의 성주가 되었다. 중국계 출신인 그는 아유타야가 버마에게 공격을 받던 와중에 1,000여 명의 중국인 출신 군사를 거느리고 중국인이 많이 거주했던 태국 동남부 지역에서 독립적 군대를 지휘하면서 아유타야 독립운동에 나서 버마군을 물리치고, 분열된 국내 정치세력 통일에 성공해 톤부리 왕조를 창건했다.

그는 왕이라는 호칭대신에 자신을 아버지(พ่อ)라 부르고 백성들을 자식(ลูก)이라 부르기를 즐길 정도로 백성들에게 정의롭고 자비로운 왕으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려고 노력했다. 딱씬은 탁월한 전쟁수행능력을 갖추고 국민과 시대적 요구에 응답한 능력 있는 지도자였다. 그는 전후 복구과정에서 직면한 여러 가지 사회, 경제적 문제들을 성공적으로 처리했으며 백성들을 굶기지 않으려 노력하고 외국과의 무역도 활성화시켰다. 궁예는 혼란한 국가체제를 정비하였고, 한때 전국의 3분의 2 가량을 차지하는 등 세력을 떨치기도 했으나 말년에는 미륵신앙(maitreya faith พระศรีอาริย์)에 기반을 둔 신정적(神政的theocratic regime การเมืองโดยเทพเจ้า) 전제주의 정치(ระบบใช้อำนาจเด็ดขาด)를 추구하다, 918년 이에 반발한 정변이 일어나 왕위에서 쫓겨나 죽음을 당했다.

궁예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것이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관심법(觀心法 วิธีการอ่านใจคน)이었다. 궁예의 부인 강씨가, 왕이 옳지 못한 일을 많이 한다 하여 충언을 올리자 궁예는 “나는 신통력으로 보고 있다”라고 부인에게 간통죄를 뒤집어 씌어 죽였으며 보살이라고 불렀던 두 아들마저 죽여 버렸다. 관심법은 반란의 음모를 적발하는 데에도 이용됐다. 궁예가 가장 신뢰했던 신하 왕건도 이로 말미암아 모반의 혐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

딱씬은 구국의 영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명상과 관련해 비정통적인 행동을 보여 승가와 충돌하게 되었고 승가와의 충돌은 정치적 정통성의 상실과 정권의 몰락을 초래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딱씬은 버마로부터 대규모 침입이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후부터 불교 명상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명상에 심취하게 되는 그는 “자신이 신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믿었으며...그의 피는 신의 피와 같이 흰 색으로 변할 것이고, 하늘을 날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이것이 가능한 것인지를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 본 후 확신을 갖게 되었다. 딱씬은 승가에 묻기를 쏘다반(โสดาบัน, 수행위계 중 預流果)에 이른 재가신도는 그렇지 못한 승려보다 높은가라는 질문을 했다. 그것이 만일 맞다면 그렇지 못한 승려들은 왕에게 예를 표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원래 승려들은 왕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거나 부복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 예다. 하지만 딱씬은 승려들을 불러다 그에게 예를 표하는지를 시험하기 시작했다. 딱씬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은 승왕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처벌을 받았다. 승왕은 강등되고 많은 고위직 승려들은 태형에 처해졌으며 500 명이 넘는 승려들이 분뇨차를 끄는 모욕을 당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후일 그가 몰락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궁예의 관심법과 공포정치에 저항 해 군부는 918년 왕건을 왕위에 추대하고 궁예를 폐위시켰다. 왕건은 고려라는 새로운 왕국을 세웠다. 궁예가 가장 신임하는 신하였던 왕건에 의해 축출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고려사에서는 궁예가 궁궐에서 축출된 뒤 보리 이삭을 훔쳐 먹다 백성들에게 비참하게 살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고 일설에는 스스로 자결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궁예가 축출된 이유를 한 가지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강력한 신정통치를 지향했던 그는 많은 비판세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충성하는 소수의 인물들에 의하여 정권을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스스로를 미륵불로 자처하는 데 대해 반발하는 기존 교단의 승려들, 정치적 권력을 나누고자 기대하였을 왕건을 지지하는 지방세력들이 그에게 반대하였다. 또 전쟁을 수행하고 신정적 전제주의를 유지하기 위하여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그들로부터도 반발을 샀다고 볼 수 있다.

딱씬 정권 말년에는 귀족들과 하부관리들의 반란이 발생했다. 딱씬은 진압을 명했으나 진압군이 도리어 반란군 편에 들어가 수도 톤부리를 점령했으며 딱씬으로 하여금 승려가 되도록 강제해 왓 쨍(วัดแจ้ง, 지금의 วัออรุญ)에 감금해 두고 대신 딱씬의 조카를 왕으로 세우기로 했다. 캄보디아와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 출병 중 톤부리의 반란소식을 접한 텅 두엉(ทองด้วง)은 그의 조카를 보내 반란 세력을 진압했지만, 딱씬을 다시 옹립하지 않고 법정에 세워 그의 죄상, 전 승왕에 대한 처벌과 법정에서 무자비하게 처형한 사람들을 물어 1782년 참수시켰다. 이어 텅두엉은 현 왕조인 랏따나꼬씬 왕국을 세웠다. 그가 바로 라마 1세이다. 따지고 보면 반란 사건의 연루자는 모두 딱씬의 최측근 인물들이었으며, 진압군들도 평소에 총애하던 인물들이었다. 텅 두엉과 그의 동생인 분마(บุญมา)는 어린 시절부터 딱씬과 같은 사원에서 동문수학했으며, 집권 후에는 많은 도움을 준 인물이다. 중국계이며 아유타야의 전통적인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닌 딱씬과 달리 텅 두엉은 아유타야 귀족 가문출신이며 중앙뿐 아니라 지방 귀족 및 식민지 국가들과의 관계도 돈독했으며 아유타야 구 귀족세력의 구심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딱씬의 몰락이유는 아주 흥미로운 주제가 되고 있다. 실록에서는 그의 정신이상설을 주장하고 이로 인해 정치사회적 혼란이 초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외의 자료나 오늘날 학자들은 권력상실의 이유를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 중 한 가지는 그가 중국계 평민 출신이었으며, 아유타야의 귀족출신들과 정치적 네트워크를 잘 구축하지 못했고, 소수 측근정치를 한 점들이 불만이 돼 권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궁예와 딱씬은 800년 이상 차이가 나는 시대적 배경에서 태어난 인물이지만, 승려로 지냈던 어린 시절,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보였던 영웅적 면모, 불교심취로 인한 비정상적 행태, 최측근에 의한 정권의 몰락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유사한 특성을 갖고 있던 흥미로운 역사적 인물들이다.

The BRIDGES Columnist 김홍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