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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전쟁 70주년 앞두고 별세한 태국 노병을 추모하며
 
  6.25 전쟁 70주년 앞두고 별세한 태국 노병을 추모하며  
     
   
 

*2013년 6월 인터뷰 당시의 위차이 대령은 군복을 입고 거수경례를 보여줬다.

 

‘노병은 사라져도 기억된다.’

6.25 전쟁 발발 70주년을 앞두고 한국전쟁에서 가장 용맹했던 태국 참전용사 한 분이 6월 20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위차이 쿤깨우 대령. 향년 91세. 장례는 6월 27일 오후 2시 방콕 방켄의 시리퐁 탐니밋(Siripong Thamnimit) 사원에서 불교식으로 치러진다.

확히 68년 전인 1952년 6월 16일. 태국 세 번째 파병 조로 한국 전쟁에 참전한 위차이 대령은 평양에 진군했고, 포크찹 고지 전투에서 승리해 ‘작은 호랑이(리틀 타이거)’란 찬사를 받은 전쟁영웅이었다.

1947년부터 1990년까지 육군으로 복무했고, 1973년엔 베트남 전에도 참전했다. 6.25 전쟁 때의 당시 계급은 하사였으며, 대령으로 예편했다.

위차이 대령이 치른 포크찹 고지 전투는 6.25 전사의 한 페이지로 남아있다.

태국군이 6.25 전쟁에 투입된 본격 시기는 UN의 반격으로 서울을 되찾고 평양을 거쳐 압록강으로 북진하던 시기였다. 전쟁 중 태국군의 용맹이 널리 알려진 것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1952년 11월 경기도 연천 서북쪽에서 벌인 포크찹 고지 전투다. 포크찹은 이 지역이 갈빗살이 붙은 돼지 갈비뼈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6.25 전쟁에서 태국군의 진군 모습

차이 대령이 참가한 이 전투에서 태국군은 1개 대대 병력으로 중공군 1개 연대의 3차례에 걸친 파상공격에 맞섰다. 태국군은 육박전까지 벌인 끝에 25명이 전사했으나 20배가 넘는 무려 500여 명의 적군을 사살하며 끝까지 고지를 지켜냈다. 이 전투로 태국군은 체구는 작지만 용맹스럽다 하여 미 8군 사령관으로부터 ‘작은 호랑이’라는 애칭을 받아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7년 전인 2013년 6월에 처음 만난 위차이 대령은 당시에도 건강이 좋지는 않은 상태였지만 6.25 참전 당시의 상황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며 들려주었다.

구들이 하나 둘 6.25 전쟁 참전을 위해 한국으로 떠나자 당시 위차이 하사도 도망치듯 집을 나와 한국행에 합류했다. 어머니는 끝까지 만류했다.

1952년 6월 16일 라차위라딧 항구에서 배를 탄 뒤 시창섬에서 다른 배로 갈아탄 뒤 부산으로 향했다. 7일이 걸렸다. 부산에 도착하자 이승만 대통령이 딸과 함께 항구에 환영하러 나와 있었다.

부산에선 기차를 이용해 서울로 갔으며 전투에 본격 투입되기 전 한 달 동안 훈련을 받았다. 다른 조들은 훈련없이 바로 전쟁에 투입되기도 했다.

위차이 하사는 당시 소총병이었다. 부대가 정찰 임무를 맡고 있어서 항상 적진 깊숙이 침투해야 했다.

포크찹 고지 주변 1km 떨어진 지역에서 어느 날 아침 혼자 걸어가고 있었는데 저격수가 숨어서 총을 쐈다. 총알이 가까스로 비껴갔고, 그는 살기 위해 산속으로 죽을힘을 다해 뛰기도 했다.

포크찹 고지에서도 역시 정찰 임무를 맡았다. 밤마다 슬며시 진지를 나섰고 구덩이에 숨어서 상황을 살폈다. 구덩이에서 3-4명이 등을 맞대고 중공군의 인기척을 들었다. 손에는 늘 수류탄을 쥐고 있었다.

한 번은 태국군 7명이 적군 40여 명에게 포위됐다. 포병 화력지원을 받고 겨우 탈출해 구사일생했다.

*태국군이 리틀 타이거로 불리며 용맹을 떨친 포크찹 고지 전투. 맨 앞의 총을 든 군인이 위차이 하사다. (2013년 위차이 대령이 집에 보관 중인 사진을 촬영함)

카로운 소리가 나면 머리 쪽으로 총알이 날아온다는 뜻이었다. 숨을 곳도 없어서 항상 몸을 웅크려야 했다. 한 번은 몸을 굴렸는데, 방금 전까지 몸을 웅크리고 있던 곳에 총알이 떨어졌다. 가끔은 폭발물 파편들이 가방이나 옷에 떨어져 구멍을 냈다. 이런 땐 총에 맞은 것으로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가 소속된 21연대는 매일 매일 죽음 앞에서 힘들게 싸우고 하루를 버텼다.

위차이 대령은 생전 이렇게 회고했다. "전투에는 매 순간 죽음이 다가왔다. ‘오늘은 내가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하는 생각이 늘 들었다. 하지만 우리 소대 40명 가운데 부상자만 10명이 나왔고, 전사자는 없었다.

전쟁영화 보기를 좋아했던 나는 전쟁에서도 많이 이용했다. 예를 들면 공병이 지은 다리는 이용하지 않고 물이 차가워도 걸어서 강을 건넜다. 지뢰 때문이었다. 전쟁을 통해 나는 정직하고 끈기가 있어야 한다는 깨우침을 얻었다. 전쟁은 우월적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탐욕스러운 것이었다. "

*무전 중인 위차이 하사(위차이 대령 제공)

차이 하사는 소식이 없으면 죽은 것으로 생각할까 걱정돼 한국에 있는 동안 매주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던 착한 아들이기도 했다. 그의 딸도 태국 참전용사를 위한 여러 활동을 하며 아버지가 한국을 위해 했던 일들을 이어가고 있다.

6.25 전쟁에 참전했던 태국 ‘불멸의 용사’ 들이 세월의 무게 속에 대부분 사라져 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다른 나라의 자유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웠던 정신은 긴 세월도 결코 퇴색시키지 못하고 있다. 비록 내가 겪지 않은 전쟁이었지만 해가 가도 시간이 흘러도 내 머리 속에 그 존재감과 비중은 줄어들지 않는다.

68년 전 매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던 위차이 대령. 그의 나이는 젊디젊은 갓 스물셋(23) 이었다.

70년 전인 1950년 6월 25일 이후 한국은 3년 1개월 동안 전쟁의 화염에 휩싸였다.

신록이 푸르렀을 2년 뒤 그 6월에 스물셋의 태국 청년은 미지의 전쟁터로 떠났고 똑같은 계절 비슷한 날짜의 올해 6월에 삶을 마감했다. '미증유'의 코로나로 세계 곳곳에서 생존과 생계의 아우성이 한창인 2020년 6월 25일의 아침. '뚜렷한 가치'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태국 노병의 안타까운 별세 소식을 전하며 문득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위차이 대령의 명복을 빌며-